1.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설교가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등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대반전으로 평가받는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로잔언약의 입안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또 그는 영국 런던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의 교구목사로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했으며,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LICC) 소장을 지내면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 등에서 폭넓게 활동해 왔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한 마디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며 이후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성령론을 주장한 외국의 신학자들로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 B. Warfield),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iper), 개핀(Richard B. Gaffin)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박형룡이 ‘신학지남’을 통해 처음 이런 입장을 펼쳤고, 신성종과 김해연 등을 통해서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했다.
스토트는 그의 저서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성경의 긍정적인 진리를 더 분명히 밝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고 있다.
2. 기본적인 접근원리
존 스토트는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접근원리들을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위의 원리는 성령론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경을 기반으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원리의 경우 부연설명에서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성경이 묘사하는 행습이나 경험이 아닌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진 부분으로부터 우리의 믿음과 표준을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행전 역시 성경의 일부이므로 교리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려 했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성령의 약속(성령세례)
먼저 그는 중생이 곧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3:3~8).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롬 8:15~16)” 말씀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라는 바울의 확언이 이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성령의 선물이 곧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선물 곧 중생과 성령세례가 다르다고 보며 구원을 받은 신자가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존 스토트는 중생은 곧 성령세례이며, 따라서 구원과 성령세례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주장한다.
4. 성령의 은사들
스토트는 성령의 충만이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교회는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5. 결론
개혁주의 성령론에 기반을 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영국 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의 원인이 성령론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존 스토트는 위대한 복음주의자답게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보여주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화를 제안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방법을 ‘Bridge Building’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과 현실을 연결하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전통적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는 교회들조차 성령님의 이해와 적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오순절운동을 따르는 모순된 경우를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Again in 1907'같은 기독교 내 운동이 그렇다. 과연 성령의 역사가 1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평양대부흥운동은 20세기 초의 한국적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독특한 성령의 사역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21세기의 성령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노예해방운동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소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과 다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스토트는 대답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소수가 아닌 다수 기독인들을 기반으로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 역시 Bridge Building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고 적용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R.A. 토레이의 성령론
1. 토레이의 성령론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개혁파 교회 내에서 신학적인 면과 목회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분명한 이질감이 생기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목회적으로 볼 때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중생과는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또한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서 있는 외국 목회자들의 저술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개혁파 계통의 인물들, 특히 케즈윅(Keswick) 계통의 지도자인 머레이(Andrew Murray), 그리고 무디(D. L. Moody)와 함께 동역했던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론 관계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 성령운동과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뒤를 이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이 또한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동일한 선상에서 사역을 했던 토레이 성령론의 가장 주요한 논리가 중생 이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대한 이정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영향을 받고 오순절 계통의 신학이 발전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교회성장을 이루는 교단으로 세워지고 있다.
2. 토레이가 미친 신학적인 영향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세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다. 그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이적을 행하게끔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증인되게끔 하는 권능을 주시는 일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는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성령세례론은 또한 성결 중심도 아니다. 그는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 성령세례 자체의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은 현저하게 성결과는 직결되지 않는 ‘봉사 중심의 능력’에 치중하고 있음을 본다. 은사의 나타남도 아니요, 성결의 체험도 아니라, 오직 복음전도의 능력을 부여받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세례론은 ‘받았으니 이제 전하라’는 복음의 역동성을 뚜렷이 지닌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는데, 그의 성령세례론에는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특이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세가지로 대답하였다.
첫째, 성령세례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성령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구분되며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 주시는 역사이다. 셋째, 성령세례는 권능을 수반하며 이 권능은 복음의 증거와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3.토레이가 미친 교회사적인 영향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인 김경재교수는 토레이의 영향에 대해서 오순절 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역사 속에서 19세기 말에 구미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개신교 교파신학은 그 주류가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는데, 19세기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했던 선교신학의 원천은 18~19세기 미국 개신교의 대각성 운동 이후 줄기차게 지속되어온 영적 부흥운동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웨슬리신학 영향을 받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물론이요, 장로교 목사들마저도 머리는 청교도적이고 칼빈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으로 훈련되었을지라도 그들의 가슴은 무디와 토레이, 채프만(J. W. Chapman) 등 19세기 부흥운동가들의 성서실재주의, 성령세례, 신유경험, 성결운동, 전도운동 등에 의해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
1907년 한국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성격이나 그 발단 과정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초기선교사 신학과 신앙의 성격을 잘 반증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시작하여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는 ‘대규모전도부흥운동’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교회사적 사실들은 한국 개신교가 오순절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또 성공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여러 가지 요인을 고루 갖춘 신앙적 옥토라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하고서..
이러한 신학자들이 말한 성령론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모두가 이해한 성령론에 대해 다른점들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직 우리는 성령론의 전문가가 아니기에...이런 이해도 있다는 것을 알면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기고' http://www.iepn.co.kr/?subi=5&type=board&id=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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