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3)

새벽지기1 2016. 3. 6. 09:32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장점과 약점은 무엇입니까? 또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를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먼저 칼빈의 종교개혁과 메노 시몬스 등이 중심이 된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은 세상과 사회를 떠나서 믿는 이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내에서 존재하며, 국가의 권세를 인정하고, 국가가 국가로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국가가 죄악에 완전히 물들어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를 떠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생겨났으며, 국가는 정의를 실행하고 선행을 장려하며 악행을 심판하는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가 국가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의무를 잘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칼빈과 급진주의자들 간의 중대한 차이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가 성경적인 원리대로 꽃 핀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참여로 인한 정치, 사회적 변혁이 많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입장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웨슬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윌리암 윌버포스의 친구로서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도록 격려한 바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가 쓴 많은 편지들 중 마지막 것은 웨슬리가 윌버포스에게 노예제 폐지 운동에 진력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로 사회를 완전케할 수는 없지만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유토피아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어느 정도는 개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조와 웨슬리의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강조를 어떻게 조화시키십니까?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칼빈주의자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였고 끝내는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나눈다면 둘 사이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찰스 시므온을 좋아합니다. 그는 진리는 어떤 하나의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두 극단의 혼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의 주장을 조화나 화해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양극단의 두 입장에 동시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인간의 지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이 함께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모두 진리라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은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더라도 말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응

리는 전세계적으로 급변하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는 인터넷과 정보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잘 대처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저는 인터넷과 정보화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를 반드시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정보화에는 여러 가지 위험과 동시에 좋은 기회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보화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거부나 무조건적인 승인이라는 무책임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정보화라는 추세 속에는 동시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같은 변화의 시대에 도시 한복판의 선교 전략 그리고 제3세계와 아프리카지역 등에 대한 선교전략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저는 여러 도시에서 선교한 바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와 고린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이는 이 두 도시가 상당히 큰 대도시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곳의 선교를 위해 사도 바울은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두 도시의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도시 내의 비종교적 채널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에베소에서는 두란노라고 하는 강의장을 이용하여 선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하며, 따라서 비종교적인 채널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청이나 관공서에서의 강의, 대학에서의 강의 등 여러 가지 토론의 장들을 활용하여 선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선교가 교회 내부에서만 일어나도록 제한 시켜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시장거리나 도시의 광장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 사역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변호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변증 작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저는 Bible Speaks Today시리즈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이것을 다룬 바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채널을 통한 복음전도의 세 가지 방식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올해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하여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복음주의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이 질문은 너무 큰 질문이어서 한 권의 책을 써야 답변이 될 것같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일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여러 정치 제도들 중 하나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세례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실수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 절차가 성경적으로 변호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고려합니다, 그래서 정치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소수가 타락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는 창조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타인의 의견 수렴 없이 정책 결정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가능하면 많은 수의 사람을 관련시키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절차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변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성경의 창조와 타락 원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주도권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활용하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에덴 동산의 아담처럼 이땅에 있는 여러 자원들을 잘 개발하도록 격려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러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탐욕과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거대한 정부가 개인의 주도권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란드의 어떤 정치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그말을 거꾸로 하면 됩니다. 즉 사회주의 역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례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요.

정말 통찰력있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자도를 독려하고 증진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윤리이든, 사회이든,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모든 영역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이점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좋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를 벗어나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대담과 정리/ 정성욱 목사 사진/ 정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