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1)

새벽지기1 2016. 3. 3. 15:17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


지난 3월 4일 오후 네 시 경 존 스토트 박사가 옥스퍼드시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열린 복음주의신학대회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위클리프 홀로 들어섰다. 대담을 맡은 정성욱 교수는 지고 교수인 옥스퍼드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안내로 존 스토트 목사를 소개받고 대담에 들어갔다


신앙 배경과 이력
안녕하십니까? 스토트 목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또한 반갑습니다. 정 목사님!

피곤하시지는 않으신지요? (78세의 노령을 의식한 물음이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정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군요.
자 이제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가족을 소개해 주시죠. 결혼을 안하셨으니까 부모님과 형제들 중심으로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1921년 4월 27일에 태어났으며 저의 아버지는 의사였던 아놀드 스토트경입니다. 아버지는 런던 서쪽 끝의 해리가(Harley Street)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는 BBC 방송국과 옥스포드가의 상점들 가까이의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구에서 성장했습니다. 전쟁중에 몇 년 동안 그곳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과학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만 저의 어머니는 경건한 루터교인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신앙 배경이 궁금합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라셨나요?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는지 그리고 학교 이력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저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리들리 홀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에 목사로서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938년 제가 17세 되던 해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 자신이 저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음을 고백하고 저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저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지요. “그리스도는 나의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이제 내 안에서 통치하신다”라고요.

현재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와 국제기독학생회(Inter Varsity Fellow ship), 그리고 현대 기독교 연구운동 등에 연관되어 활동하시는 것으로 아는 데 좀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저는 정 목사님과 독자 여러분들이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기 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이 먼저 존재했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영국복음주의연맹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1846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영국복음주의연맹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네덜란드에서 복음주의대회가 열렸고 그 기간 중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후 영국복음주의연맹은 자체 조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1951년부터 세계복음주의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해왔으며, 1951년에 그 단체의 교리적, 신앙적 기반을 닦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50여 년 전 국제복음주의학생회(Inter -national Fellowship of Evange -lical Student)의 발족 초기부터 참여해왔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아 전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나라들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현대 기독교 운동연구라고 부르신 것은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연구소는 18년전인 1982년에 설립되었고, 저는 주요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일하였고, 그러던 중 65세가 되어 퇴직하면서 명예총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디에서 주로 활동해 오셨습니까? 영국입니까?

나머지 시간은 주로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서 보내셨는지요?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서 말씀해 주시죠.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약 5년간은 교구의 부목사(curate)로 사역하였습니다. 섬겼던 교회는 런던의 중심부의 랑함플레이스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였습니다.
1950년 담임 목사님께서 돌아가셔서 제가 후임으로 담임목사(rector)가 되었습니다. 올 소울즈 교회에서 1950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였습니다. 그후 저는 명예담임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55년간 사역을 해온 셈입니다.
올 소울즈의 담임목사가 된 지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은 저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이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2년 부터 1977년까지 저는 전세계에 걸쳐서 50회의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전세계에서 대학 복음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학복음화대회 인도 초청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탓으로 젊은 대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군요. 그러나 여전히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두주 전에는 3주간의 동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우간다와 케냐 지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목요일부터는 미국 지역을 3주 동안 순회하며 사역할 계획입니다. 저는 요즈음 1년중 6개월은 올 소울즈 교회의 목회에 협력하는 일에 보내며, 3개월은 세계순회사역에 그리고 3개월은 연구와 저술에 보내고 있습니다.

스토트 목사의 경건의 시간 그리고 독신 생활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큐티(경건의 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날마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고 계신지요?


저는 약 30년 전에 저에게 어떤 매일 성경읽기표를 소개해 주신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읽기표는 1842년에 로버트 머리 맥체인 목사가 고안해낸 것입니다. 맥체인 목사님은 그의 회중들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경읽기표를 만들어 회중들이 1년에 구약성경을 한 번, 신약성경을 두 번 통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성경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읽게 되면 매일 네 장 정도의 성경을 읽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매해의 첫날인 1월 1일에는 창세기 1장, 에스라 1장, 마태복음 1장, 사도행전 1장을 읽게 되죠. 이러한 방식은 창세기를 계속 읽어 내려갈 때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방지해 주는 좋은 방식입니다.
특히 새해 첫날 읽게 되는 네 장은 성경에 나타난 네 개의 큰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역사의 시작을, 에스라 1장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을,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의 시작을, 사도행전 1장은 교회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전체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주제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맥체인식 성경읽기표를 특히 모든 목회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성경 전체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일반 성도들에게는 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성경읽기 모델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처럼 독신 생활을 통해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독신 생활이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 주었는지요? 가톨릭과 같이 주님께의 헌신을 위한 독신 헌신 제도를 복음주의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독신 생활이 가져다 주는 제일 큰 유익은 ‘자유로움’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독신으로 살게 되면 아내와 가족의 일보다는 주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저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따라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양쪽 다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 제도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한두 해 전에 IVF 출판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상당히 좋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독신의 문제」(The Single Issue)이며, 중국계인 알버트 슈(Albert Hsu)가 저술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썼습니다. 저는 그 부록에서 알버트 슈가 제기한 독신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그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을 하나의 은사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저는 가톨릭의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 제도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좋은 증거는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의 자격 요건 중에, 그들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때부터 목회자들의 결혼 생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의 독신은 예외적인 것이지, 의무적인 규범이 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들
너무 명쾌한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목사님의 현재까지의 사역에 대한 좀더 상세한 질문들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집필을 하셨는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어떤 책을 어떤 동기로 집필하셨는지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앞으로의 집필 계획에 대해서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몇 권의 책을 집필했는지 세어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저서의 숫자를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범죄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 비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40에서 45권의 책을 저술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권은 영어로는 출판되지 않고, 한국어로만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가 한국의 의과대학생 수련회에 가서 강의한 내용인데, 한국의 IVP에서 출판했고, 영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가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 책에 저의 영혼과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내가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인도되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을 결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윤리에 관한 저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입니다. 그 책은 현재 제3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책은 「현대 교회와 설교」(I Believe in Preaching)입니다. 또한 성경 강해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Bible Speaks Today시리즈를 통해 출간된 「로마서 강해」, 「산상수훈 강해」, 「사도행전 강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BST시리즈 「로마서 강해」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7장에 대한 목사님의 강해는 탁월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7장을 강해하시면서 7장에는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반하여, 8장에는 반복적으로 성령님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죠. 그것이 제게는 많은 유익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로마서 7장이 강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책이 있다면, 그것은 최근 출간된 「복음주의의 진리」입니다. 아마도 이 책은 저의 마지막 저술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복음주의 교회에 남겨주고 싶은 저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은 제가 60년 이상 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가장 깊이 깨닫게된 복음의 정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목사님의 「복음주의의 진리」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는 그 책에서 우리가 믿는 복음의 삼위일체적 성격과 차원을 강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지속적인 구원 적용 사역을 포함한 총체적인 은혜의 소식이라는 목사님의 주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물론 제가 저술한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50여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200만 권 이상 보급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판이 1958년에 나왔기 때문에 좀 오래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이 책을 여전히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한 권 더 언급하고 싶은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The Contemporary Christian)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기독교 윤리에 관한 책인 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교리와 제자도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은 어떠신지요?


정 목사님, 혹시 최근에 제가 쓴 새(Birds)에 대한 책을 아십니까? 저는 상당히 열정적인 조류 관찰자이며 동시에 조류 사진작가입니다. 한국의 조류 관찰자 중에 윤무부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윤 교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한국의 조류 관찰을 위해 저를 두 번이나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담은 책이 한국의 IVP에서 한국어로 출판 되었습니다.
이 책은 칼라 판이며, 제가 찍은 150여 장의 사진들을 담고 있습니다. 각 장마다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담고 있지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새: 우리의 선생님」(Birds: Our Teachers)입니다. 이것이 일반은총 영역에 관련된 저의 저술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미래 저술 계획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목사님께서는 ‘현대기독교에 대한 런던강좌’(London Lectures in Con temporary Christianity)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런던 강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런던 강좌는 매년 한 번씩 열립니다. 강좌의 내용 또한 출판됩니다. 올해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기 때문에,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에서 제게 강좌를 부탁했습니다.
강좌의 주제는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비교할 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The Incompar able Christ)라는 제목의 강연을 네 차례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이 강좌는 내년에 출판될 것입니다.

멘토에 대하여
확고한 복음주의자로 사역해오셨는데, 목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 영향을 준 멘토들이 있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분은 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내쉬 (E. J. H. Nash) 목사님이십니다. 내쉬 목사님은 특별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다니는 학교에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입술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제가 회심한 후 저에게 매주 한 번씩 5년 동안 양육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헌신적인 신앙 양육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편지들의 내용은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가르침을, 때로는 책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상당히 제멋대로 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분께 진 빚이 얼마나 되는가는 제가 하늘에 올라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내쉬 목사님이 저의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주된 멘토였습니다.

내쉬 목사님 외에 다른 멘토들이나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칼빈 같은 좀더 클래식한 신학자들도 좋습니다.


물론 저는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분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입니다. 그는 1665년에 「개혁 교회의 목사」(The Reformed Pastor)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 주간 동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큰 영감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영국 성공회 감독이었던 라일(J. C. Ryle)이 있습니다. 라일은 복음주의자였습니다. 라일은 1880년부터 1900년까지 리버풀 지역의 감독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저술한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거룩함(holiness)에 대한 그의 책 「거룩에 대한 개혁파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Holiness)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미국의 벤자민 워필드도 있습니다. 저는 그가 쓴 「계시와 영감」(Revelation and Inspiration)을 읽고 성경관을 확립하였으며, 성경 중심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 외에 다른 여러 사람들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역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들은 어떤 일이었는지요? 1974년 로잔언약문 작성에 참여한 일이었을까요?


(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사건은 1950년 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올 소울즈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매우 젊었고, 또 목사 안수를 받은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였습니다. 그런 제가 런던 중심에 있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는 미숙한 29세의 나이에 교회의 지도부로 끌어 올려졌고,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했습니다.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일 밤 그 집회에 참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저는 대학복음화대회의 주강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대학과 옥스포드대학을 포함한 전세계의 대학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일 역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어바나학생선교대회(The Urban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를 들 수 있습니다. 3년마다 IVF의 주관 아래 미국 일리노이주 어바나에서 학생선교대회가 열립니다. 요즈음에는 만명이상의 학생이 모이는 거대한 대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1964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이 대회에 매일 아침 성경강해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였습니다. 각 대회 때마다 4-5회씩 강해를 하게 됩니다. 저는 1964년, 67년, 70년, 73년, 76년대회에 계속 초청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매일 아침마다 만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1967년 킬리(Keele)에서 열린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 ican Cong ress)입니다. 제1차 킬리대회에서는 1천여 명이 모였고, 10년 후인 1977년 노팅햄대회에서는 2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 두 대회는 참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대회가 있기 전 영국 성공회 교회 내에서 복음주의운동은 그 위치를 견고히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대회 기간 중에 이러한 점들을 회개하였고, 복음주의자들이 영국 성공회 내에서 좀 더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복음을 충실히 전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넘어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와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1967년에 이루어졌고, 7년 후인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는 전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복음주의자의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헌신은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가 제창했던 ‘사회복음’(Social Go spel)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라우쉔부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주의 사회를 동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적인 복음이 사회에 던져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사회주의적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어떤 목적으로 만드셨는지요? 이 연구소의 사역과 성격을 듣고 싶습니다.


이 연구소의 주된 프로그램은 10주간의 코스로서 ‘현대세계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9월에서 12월까지 열리며, 전세계에서 약 50여 명이 참가합니다.
저는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대한 강의를 비롯하여, 현대 세계의 성격, 현대 세계에서의 제자도와 선교 등에 관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현대 세계 사이의 다리 놓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4주 코스도 있습니다. 이 코스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진 세계 도처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매달 50여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런던 연구소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일으켰던 라브리 운동과 유사점이 있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개인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저보다 10세 가량 나이가 많았습니다. 저는 쉐퍼 박사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브리 운동과 런던 연구소의 긴밀한 관계는 기구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라브리 교수 출신인 제람 바즈는 미국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카베넌트칼리지(Covenant College)에서 프란시스 쉐퍼연구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람 바즈는 원래 영국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라브리에서 사역할 때 런던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런던 연구소에서 여러차례 정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영국 라브리 교수 출신인 리차드 윈터 박사도 우리 연구소에서 강의한 바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학자 오스 기니스(Os Guiness) 역시 런던 연구소의 자문위원이었고 또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결국 강의자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었고 또 강의가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군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신을 실현한 것같이 보이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말마다 세미나를 열 때, 영국 라브리 운동에 속한 몇 분을 함께 모셔서 강의를 듣습니다. 이것은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에큐메니칼한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런던연구소와 같은 취지의 연구소들이 현재 전세계 20여 곳에 이미 설립되었거나 설립중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에 이미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지난 3주간 저는 이 연구소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이 연구소의 이름은 기독교적영향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Impact)입니다. 이 곳 외에 잠비아와 짐바브웨 등지에도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구소들이 함께 동역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세계 IVF의 부회장으로 섬기고 계신데 IVF를 통해 본 세계 학생 복음주의 운동의 현황과 전망은 어떤지요? 어떤 나라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까?


사실은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가 국제적인 명칭입니다. 저는 다년간 이 단체의 부회장으로 섬겨왔습니다. 또한 영국의 IVF 그룹인 대학간 그리스도인 연합(University-College Christian Fellowship)의 회장직을 세 차례나 수행하였습니다.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에 관해서 말한다면, 저는 최근의 긍정적인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50년 전에 저희들에게 하나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에서 자율적인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비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율적’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자율적일 때만 미국이나 영국 등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본부로부터 통제를 받는 비능률성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교리나 풍토 등은 함께 공유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각각의 집행부에 의해서 관리되며, 철저한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0년 전에 가졌던 우리의 비전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많은 제3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를 통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는 나이지리아입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년 열리는 연례 수련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30여 개의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75개 국가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50년 만에 이렇게 크게 성장한 것은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과 정리/ 정성욱 목사 사진/ 정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