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2)

새벽지기1 2016. 3. 4. 16:56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

지난 3월 4일 오후 네 시 경 존 스토트 박사가 옥스퍼드시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열린 복음주의신학대회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위클리프 홀로 들어섰다. 대담을 맡은 정성욱 교수는 지고 교수인 옥스퍼드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안내로 존 스토트 목사를 소개받고 대담에 들어갔다


성경 해석에 대하여

이제 목사님의 성경 해석에 대하여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기초 교리 입문서와 아울러 많은 성경 주해를 집필해오셨습니다만, 목사님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나 특정 구절이 있는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성경 66권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 없습니다. 저는 66권 전부를 좋아합니다. 만일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말해 보라고 강요하신다면, 저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구절은 저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주요 본문 구절이었고, 또 저는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특별히 애착이 갑니다.

목사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마태복음 11장 28절 등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일동 웃음). 비록 우리는 목사님의 성경해석학에 익숙하지만, 한 번 더 묻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목사님의 접근 방법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어떤 참고 자료들을 이용하시며, 통찰이나 적용점은 어떻게 찾아내시는지요?


제가 「성경연구 입문」(Underst anding the Bible)에서 논의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세 가지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의 원리는 단순성(simplicity)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화적 해석을 거부하며, 공상적인 해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단순하며, 분명하며, 자연스러운 의미를 추구합니다. 물론 이 자연스러운 의미가 비유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성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역사성(historicity)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말씀도 하나님께서는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은 어떤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과거의 역사와 문화로 되돌아가 이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조화(harmony)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과 모순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마음대로 조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성경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 성경 내용의 조화로운 해석을 추구합니다.


성경 해석의 참고 자료를 예로 들면 무엇보다 헬라어 신약성경이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어구 사전(concordance)을 참조합니다. 저는 고전적인 성경 주석류를 참고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참조하기 전에 스스로 본문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하고나서 다른 참고 자료들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사전 역시 자주 참조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통찰과 적용점을 얻는 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본문을 묵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또 읽다보면 본문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배적인 해석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누구의 성경주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특정한 어떤 개인의 주석으로부터만 도움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죠. 갈라디아서의 경우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스위트 교수의 「마가복음 주석」, 웨스커턴의 「요한복음 주석」, 리차드 롱거네커의 「사도행전 주석」 등 다양한 주석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며, 강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어려움은 의심할 바 없이 문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먼저 특정한 앵글로색슨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내’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고대 근동과 헬라-로마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리고 ‘나’는 제3의 문화권에서 성장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문화적 전이’ (cultural tran- sposition)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런던 연구소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화적 전이’를 가르칩니다.


여기서 ‘문화적 전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단락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 단락의 내용이 당시의 특정한 문화 상황의 컨텍스트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정당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본문을 다른 문화의 상황에 재맥락화 (re- contextualise) 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내용을 예로 들어 봅시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발을 씻기는 행위는 집을 방문한 친구나 손님들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으로 통상화된 예의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 집의 노예나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화권에서 우리는 맨발로 걸어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집에 노예급에 해당하는 하인이 없으며, 길거리 역시 훨씬 깨끗할 뿐 아니라 자동차나 여타 교통 기관을 이용해서 여행을 합니다. 따라서 발을 씻기는 행위가 필요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면 집주인은 우리가 발을 씻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손을 씻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 옵니다. 결국 문화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할까요? 이 본문이 완전히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는 교훈은 없으며 따라서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는 딱딱한 문자주의’ (wooden and unimaginative literalism)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방문한 손님들에게 ‘신발을 벗으십시오 그러면 발을 씻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야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무슨 교훈을 주시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예수님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5)고 하신 말씀의 본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아무리 천하고, 불결하고, 힘든 일일지라도 섬김의 일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약하면 오늘날 제가 친구의 발을 씻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구의 신발을 기쁘게 씻어줄 수는 있으며, 친구의 집에 있는 화장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바른 섬김은 더럽고 추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문화적 전이’의 실례입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의미(meaning)는 그대로 보존하되 이 교훈을 실천하는 문화적 형식(cultural form)을 현대 문화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적인 이슈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많은 저술들을 내셨습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일에 대한 조언을 주신다면?
이 문제는 사회윤리적 이슈에 해당하는 것이군요. 저는 여기서 원리들(principles) 과 정책들 (policies)을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템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원리와 정책에 대한 그의 구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목회자들은 원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면에 목회자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법률의 개혁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개발하는 일을 정치가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실업이라는 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실업 문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실업 문제에 대하여 설교해야 합니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대답은 ‘예’ 이기도 하며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노동에 대한 성경적인 철학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 목회자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래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키고 관리함에 있어서 아담의 협력을 요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회자들의 임무는 실업이 매우 심각한 사회적 악 (social evil)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들 가운데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을 일으켜 주시고, 그들이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의 문제들을 적절한 정책을 통하여 해결하는 일은 목회자들의 일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과 철학을 가진 정치인과 경제인의 일인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기독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도록 격려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상태에 빠져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좋은 정책을 고안하면서, 현실의 악과 싸우는 일은 기독인 평신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이 싸움을 독려하고 영적, 사상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원리와 정책을 구분하는 것의 실례가 됩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결국 목회자들은 성경적 원리를 밝히고 전함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평신도들이 이것을 그들의 상황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사회적 이슈들을 접근하는 원리들을 얻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자연보호, 환경, 인종, 성 문제 등에 관한 성경적 원리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현대 교회와 설교」를 저술하여 원리와 정책에 대한 구분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설교자 중에 추천할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 참고할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십시오.
우선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록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약 1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책은 지금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인 목사님 중에 강해 설교에 뛰어나신 분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Boice)목사님이십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제10장로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의 총장으로 계시는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박사를 들고 싶군요. 이 분은 구약 신학자이시면서 성경 강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돈 로빈슨 (Haddon Robinson) 박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오켕가 설교연구소 (Ockenga Institute of Preaching) 의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로빈슨 박사는 설교에 관한 훌륭한 책을 저술하였고,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설교하고 있는 켄달(R. T. Ken dall) 목사를 들 수 있겠군요. 스코틀랜드에도 몇 분이 있습니다. 최근 은퇴하신 글래스고우의 에릭 알렉산더 (Eric Alexdander) 목사님 역시 강해 설교에 뛰어나십니다. 동아시아의 싱가포르에서 사역하는 바비 승(Bobby Sng )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의사입니다. 그는 한 때 싱가포르 IVF의 총무로 사역하였고, 탁월한 강해 설교를 해왔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
목사님은 특히 복음주의 지성 운동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쉐퍼박사가 주장한 것처럼 전천년주의에 치우침으로 초래된 위험과 연관된 것입니까?


저는 쉐퍼 박사의 지적이 옳다고 믿습니다. 전천년주의 (Premill ennialism)는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거리낌없이 사회적 이슈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회는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니까요. 왜냐하면 사회가 더 나빠질수록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사회를 향상시키면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또하나의 요인은 은사주의 운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자들 중 일부는 지성의 중요성을 무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은사주의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4장 20절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과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구절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생과 스승이 되시는 주님께 굴복하고 그 분의 가르치심을 경청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과 영성이 조화를 이룬 청교도 영성 운동과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영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영성’이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신교가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도는 신약성경적인 용어이며, 제자도는 성경 읽기, 묵상, 예배, 기도, 봉사, 전도등 모든 것을 포용해낼 수 있는 용어입니다.
둘째는,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잘못하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위험한 분리 현상을 영속화시키게 됩니다. 즉 어떤 것은 영적이며,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와 행동을 낳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영적인 영역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영성’이란 단어를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목사님께서는 제임스 휴스턴과 유진 피터슨 등의 영성 작가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임스 휴스턴은 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입니다. 유진 피터슨과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저는 그분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두 분들이 하고 계시는 사역을 아주 좋아하며 지지합니다. 다만 저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사용해야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는 ‘제자도’ 또는 ‘제자성’이라는 단어가 더 성경적이며 또한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포괄적인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 혹시 헨리 나우웬을 알고 계시며, 그 분의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는 최근에 돌아가셨죠. 저도 그분의 책을 세 권 읽었습니다. 저는 헨리 나우웬이 로마 카톨릭의 신부이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개신교적인 신학 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신학 사상에는 카톨릭적인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럼 그 분의 칭의론에 대하여 검토할 기회가 있으셨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나우웬의 영성에 관한 저술인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와 다른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나우웬이 ‘무력한 어린아이 또는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린 처절한 희생자’와 같은 카톨릭적인 예수상(像)을 비판하는 것을 읽고 기뻤습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승리자로서의 부활하신 예수상이 가톨릭 교회 안에 거의 없음을 한탄스러워 했습니다. 카톨릭적인 영성에서 중요한 예수의 이미지는 나약한 어린 아이와 십자가에 못박힌 희생자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우웬이 이 점을 지적한 것을 읽고 매우 기뻤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을 구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기독교의 제자도가 기독교의 지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지성만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과 기독교적 정서, 그리고 기독교적 의지 등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적 제자도 또는 제자로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이 제자도라는 말씀이시군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는 제자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청교도 영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주시죠.


청교도 영성에 있어서 제가 가장 경탄하는 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뿐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도덕적, 목회적 사역은 심오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죄악성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리더들을 추천하신다면 어떤 분들이 계시는지요?

또한 복음주의 지성 운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들이나 단체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먼저 오스 기니스(Os Gui- ness) 박사를 언급하고 싶군요. 또한 옥스퍼드 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 그리고 고든 콘웰 신학교의 데이빗 웰즈 (David Wells) 박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정 목사님도 웰즈 박사의 책을 아시죠.
이외에도 데이빗 쿡 (David Cook) 박사, 그리고 마이클 쉴루터 (Michael Schluter)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희년센터를 설립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존 와이아트(John Wyatt) 박사를 들 수 있는 데요, 그는 의과대학 교수로서, 2년 전에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의료 윤리에 속하는 낙태와 안락사 문제 등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아직까지 40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5세기 이후 사막 교부들의 영성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시는지요? 이들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글쎄요. 사막 교부들에 대하여 제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사막으로 은둔한 행위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점에서 사막 교부들과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님은 높은 산 같은 한적한 곳으로 홀로 가셔서 기도하시고는, 다시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돌아오시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주님은 사역에의 참여와 혼자만의 묵상을 위한 은둔 사이를 균형 있게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삶에 있어서 혼자만 묵상을 위한 은둔은 사실상 사람들과 세상 가운데서 더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막 교부들은 이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