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4)

새벽지기1 2016. 3. 7. 05:53


한국 교회를 몇 번 방문하셨는데, 한국교회에 어떤 조언을 주고 싶으신지요?


저는 영국의 한 방문객이 한국의 문화와 교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이 좀 건방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한국 교회가 교회의 크기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성도수의 크기에 따라 교회를 평가하는 경향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교인수의 크기도 하나의 기준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여러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교회가 성경적인지, 또 교회에서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잘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지, 그리고 기도가 살아 있는지 등의 기준도 중요합니다.
둘째는, 유교적인 스타일의 리더십 문제입니다. 담임목사는 지나친 존경을 받거나 때로는 숭배되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기독교의 리더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어야지 공자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정신을 본받아야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종으로서의 리더십, 즉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폐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의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예수님보다도 공자를 더 따르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잡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쳐니티 투데이와 같은 성격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문서를 통한 복음 운동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크리스채니티 투데이」나 「소금과빛」 같은 잡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잡지들이 진지한 서평란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서평을 통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목회자나 평신도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책의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읽어야하며, 또 읽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서평란은 교회의 삶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잡지들은 교회 내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흐름들을 포착해서 그것들에 대한 성경적인 평가를 내려줌으로써 목회자와 평신도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잡지들을 읽습니다. 또한 고정적인 신학적, 신앙적 상담란을 만들어 궁금한 점들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해 줌으로써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과 로이드존스목사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신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하여 좀 설명해 주십시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저보다도 15-20세 정도 연상으로 제 아버지와 비슷한 세대이셨기 때문에 저는 그 분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그를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분의 조언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저술한 책을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 아홉 권의 로마서 강해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팬이며, 팬 클럽의 회원들 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과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서로 다른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들인 성공회나 감리교나 장로교 안의 회원으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66년에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공회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독립교회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그 모임의 의장은 저였습니다. 제가 청중석에 앉아 있는 젊은 목사들을 보니 그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목사 사직서를 쓰려고 고민스러운 얼굴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들이 좀더 시간을 가지고 이 문제를 생각할 것과 좀더 신중할 것을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에 끼어 들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그분의 ‘남은 자’ 사상을 반박하면서 ‘남은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지, 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저 같은 젊은 사람이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분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에 놀랐습니다.
그 회의가 있은 후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의장의 권한을 오용한 것을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에 그렇게 한 것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점은 정 목사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남은 여생에 꼭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제게 남아있는 여생이 몇 시간일지, 며칠일지, 몇 달일지, 아니면 몇 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아침 저 자신의 생명의 한계를 기억하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과거에 청교도들이 기도한 것처럼 잘 사는 것뿐 아니라 잘 죽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고백을 죽음의 순간에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저의 남은 여생 동안 이루고 싶은 주된 소원입니다.

아시아의 종교들을 공부하신 적이 있는지요? 이런 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저는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빛이시며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으로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창조의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창조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계시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성의 빛과 양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한 구속 그리고 부활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한 것으로, 이 점에서 그는 어떤 경쟁자도 동등자도 후계자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는 유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유일성과 궁극성을 변증해야 합니다.

장시간의 대담에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을 마치고

지난 1월, 「소금과빛」 편집부가 존 스토트 목사님과의 대담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사실 스토트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지 잘 몰랐다.

그러던 중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에게 소개를 부탁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3월 4일 옥스포드 지역 목회자들을 위해 위클리프홀이 주관하는 복음주의신학대회에 스토트 목사님이 주요 강사중 한 분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스토트 박사 외에 마이클 그린 박사와 맥그래스 교수가 주강사로 초청되어 있었다).

맥그래스 교수가 직접 스토트 박사께 「소금과빛」의 대담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셔서 교수님께 모든 일을 맡겼다. 얼마 후 스토트 목사님께로부터 긍정적인 회신이 왔고, 결국 대담 날짜와 시간은 3월 4일 오후 네 시 그리고 장소는 위클리프 홀의 맥그래스 교수 연구실로 정해졌다.

거의 80세가 다 된 노인 스토트 목사! 그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정열은 어느 젊은이보다 더 뜨겁고 강렬하였다.
무엇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그의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검소한 옷차림은 그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주 예수님과 복음만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꿋꿋이 살아온 자태가 몸에 베어 있었다.
자신을 ‘스토트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그분의 말씀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음을 열고 질문에 답해 주셨기에 두 시간에 걸친 대담은 사뭇 진지하고, 활기가 넘치며, 간혹 웃음을 자아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다. 빡빡한 일정 가운데 겨우 얻은 두 시간이어서 한 가지 한 가지의 질문에 대해 좀더 깊이 들어가기 어려운 점이 매우 아쉬웠다.

대담 도중 스토트 목사님이 ‘영성’이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영성’보다는 ‘제자도’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예리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너무 무비판적으로 가톨릭적인 용어와 의미로서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내심 가지게 되었다. 스토트 목사님은 시종일관 같은 입장을 견지했고 ‘제자도’와 ‘제자로서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 ‘영성’이란 말은 좀더 인간의 주권과 능력을 높이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영성’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고자 한다면 ‘제자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영성의 실체와 내용을 분명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한국 교회가 교회를 건물의 크기와 성도 수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지적했을 때 공감이 되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보니 비록 숫자는 적지만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과 그러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반성하고 돌이켜야 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재삼 되새기게 된다.

대담과 정리/ 정성욱 목사 사진/ 정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