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죤 스토트의 설교관(1) / 김완식목사

새벽지기1 2016. 3. 15. 13:28

죤 스토트의 설교관
-「현대교회와 설교」를 중심으로-


Ⅰ. 설교의 도전과 영광

1. 설교의 영광

설교는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설교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신빙성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한 면이 상실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구조적(救助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주도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실, 또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가장 간단한 전달 방법들-낱말과 말-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요구하셨다는 사실들을 간과하거나 부인하면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백성에게 전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 곧 육신이 되신 그의 말씀 안에서 말씀하셨고, 오늘날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와 성경이 살아 역사 하도록 하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해야 한다. 즉, 우리가 설교해야 하는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이 사실에 기인한다. 


설교가 기독교에 있어서 중심적이며 독특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 전체속에서 인정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시작된 설교의 전통은 초기 교부들과 동방의 크리소스톰, 서방의 어거스틴과 같은 니케아 종교개혁 이후의 위대한 신학자, 설교자들로 이어졌으며, 중세의 프란시스회와 도미닉회 설교 수사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웨슬리와 휫필드를 지나 19세기와 20세기의 현대 목사들에 이르는 2천년의 역사를 지닌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서 설교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정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고 설교는 중요하게 강조되어 왔다.

2. 설교에 대한 현대의 도전

오늘날 교회의 파멸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이제 설교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확신있게 선언한다. 설교는 죽은 방식이며, 의사전달의 낡은 형태이고, ‘케케묵은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라고 말한다. 현대의 정보 전달 수단은 설교를 대신하게 되며 설교는 현대의 분위기에 상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널드 코건 박사(Dr. Donald Coggan)는 설교에 대한 이런 식의 견해에 대해 마귀에 의해 행해지는 그럴듯한 거짓말이며, 이 거짓말의 결과로 마귀는 자신의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마귀는 이런 방식으로 통하여 설교자들을 효과적으로 침묵시켰으며 사기를 저하시켰다. 현대인들이 갖는 설교에 대한 환멸의 뿌리를 캐 보자.

1) 반 권위적인 분위기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만큼 세계가 권위에 대하여 이렇게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반항한 적은 없었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적이긴 하였으나, 현대의 반항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받아들여지던 모든 권위들(가정, 학교, 대학, 국가, 교회, 성경, 교황,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물론, 이런 반항 중에는 어떤 것들은 책임감이 있고 성숙해 있으며, 모든 면에서 기독교적인 것들도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고, 압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자 하며, 압제받는 사람들이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도하시는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열망하는 저항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도전의 추세는 마땅히 지켜야 할 권위까지도 부정하는 상황이 되었고 설교단도 그들이 저항해야 할 권위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와 함께 시적되었으며 19세기 때에 더욱 노골화 되었다.

2) 인공두뇌학 혁명(정보 시대)

‘인공두뇌학’(Kybernētēs, 즉 조타수에서 유래)은 인간과 전자 계산기, 즉 두뇌와 컴퓨터의 의사전달 메카니즘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따라서 인공두뇌학의 혁명은 복잡한 전자계산기 장치의 발달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급격한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시대에 있어서 텔레비젼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1) 설교적 측면으로 본 텔레비젼의 역기능
텔레비젼에 대해 죤 스토트는 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매체로 순기능이 있으나 설교적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텔레비젼은 신체적으로 나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스크린 앞에서 예배하는 것이 노약자에게는 축복이지만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지역교회의 회원이 되지 않고 스크린 예배를 선택할 때 그 축복은 의문이다. 스크린은 능동적인 봉사와 전도는 제처두고서라도 교제, 성례, 그리고 회중예배에의 인격적인 참여를 허락하지 않는다.


둘째, 텔레비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무비판적이 되게 한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젼 앞에 앉을 때에 오락을 요구하는 것이지 참여하거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텔레비젼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민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우리는 텔레비젼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들(전쟁, 자연재해, 사고, 기아 등)을 보게 된다. 우리는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채널을 돌리든지 스위치를 끄든지 혹은 우리 내부의 감정의 스위치를 거버려서 무감각하게 되어 실제로 눈을 감는다. 결국 텔레비젼으로 인해 정서적 메카니즘이 손상된 세대, ‘복음에 대하여 완고한’ 새로운 세대를 키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넷째, 텔레비젼은 심리적으로 사람을 혼란시킨다. 왜냐하면 텔레비젼은 인공의 영역과 고안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하는 화면은 현실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한 것이며, 스튜디오 밖에서 촬영한 것도 누군가의 손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텔레비젼의 화면이 보여주는 것은 비현실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혼돈하게 된다. 죤 스토트는 이러한 사람들이 예배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궁극적 실체에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다섯째, 텔레비젼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혼돈에 빠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과 선의 절대성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인상아래에서 우리의 방비는 약화되고 우리의 가치판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무엇이 정상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수정되며 우리는 그렇게 배워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이다.

(2) 텔레비젼의 역기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

첫째,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텔레비젼에 접근하는 일에 대하여 더 큰 규제를 행사하여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매스미디어의 세계에 침투할 수 있는 길(텔레비젼 작가, 제작자, 연출가 등)을 모색하여야 한다.
셋째, 설교자들은 텔레비젼에 길들여진 회중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설교를 듣고 싶어한다거나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미 신속하게 움직이는 스크린에 익숙해진 상태인데 어떻게 가벼운 기분의 전환이 없이 이야기만 하는 한 사람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다. 결국 그들은 설교가 시작되면 스위치를 꺼 버린다.

3) 교회가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

오늘날에 교회가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이 설교를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설교를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설교한다’는 것은 선구자 혹은 포고자의 역할을 맡고서 공중에게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하고 확신있는 메시지가 없이는 설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확신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처음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교회라는 추는 신앙의 시대와 회의의 시대를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시대에 교회와 윤리의 상대성이 적용되며 절대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다윈은 많은 사람에게 종교는 진화의 한 국면이라고 확신시켰으며, 막스는 종교를 사회 현상의 하나로 납득시켰고, 프로이드는 그것을 하나의 노이로제로 확신시켰다. 성경비평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켰다. 비교 종교의 연구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시키는 추세로 나갔으며, 실존주의는 순간의 만남과 결단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역사의 뿌리를 단절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인격과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급진적 신학과 세속적 신학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잃게 만들고 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먼저 회복하지 않고서는 설교를 회복할 기회는 없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성과 적절성, 그리고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고 다시 복음에 매료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켐멜 몰간은 ‘설교는 말씀의 선포이며 계시된 그대로의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