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스토트

죤 스토트의 설교관(2)/김완식목사

새벽지기1 2016. 3. 16. 07:37

죤 스토트의 설교관
-「현대교회와 설교」를 중심으로-


Ⅱ. 설교에 관한 신학적 기초들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설교를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에 대해 죤 스토트는 그 본질적인 비결은 어떤 기술에 정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달리 말하자면 신념이 방법론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한 신념

설교의 개념과 행위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 즉 그가 믿는 존재, 그의 행위, 그리고 그의 목적에 대한 어떤 신념이 있다. 우리가 믿는 신관에 따라 우리가 전하는 설교의 본질이 결정된다.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세가지 확언들이 특별히 관련 있다.

첫째, 하나님은 빛이시다.

[요일1:5]"(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죤 스토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주장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되어 왔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성경에서 종종 빛은 순결을 상징하며 어두움은 악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두움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요한의 진술은, 하나님은 숨겨지지 않고 열려 있으며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확신해야 한다.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빛의 속성이듯이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중에게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는 그의 빛을 그들의 어두움에 비추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고후4:4-6)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행위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구속활동을 통해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셨다.

셋째,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설명하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목적을 말씀해 주셨고 언약을 주셨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의 독생자는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친히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이를 또한 말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침묵할 수 없고 말을 해야만 하는 때는 바로 하나님께서 빛이신 사실(그래서 알려지기를 원하신다)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따라서 자신을 알리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셨다) 사실을 확신하는 때이다.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그 때는 우리도 역시 말을 해야만 한다.

2. 성경에 대한 신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교리는 자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성경에 대한 교리로 인도된다.

첫째,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죤스토트는 여기에서 영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영감이란 받아쓰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대행자들)이 품은 생각들과 그들이 한 말들이 동시에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이 되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과 입에 넣어 주신다. 영감은 그들의 역사적 탐구나 그들의 지성의 자유로운 사용과 상반되지 않았다. 즉 신적 영감이 인간의 저작성을 무시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저작성이 신적 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둘째, 하나님은 여전히 그가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진술에서 멈춘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있느나 죽은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말씀하셨으나 현재 침묵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살아있는 말씀이며 어떤 시대건 그 시대를 위한 그 시대의 메시지이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기록되었으되’ 혹은 ‘가라사대’라는 말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제임스 패커는‘한 세대동안 성경을 연구하였지만 그 진술에 있어서 가장 만족할 만한 모범은 성경은 하나님이 설교하는 책이다 고 기술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또한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시면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활동적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사55:11]"(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3. 교회에 대한 신념

설교와 관련하여 교회에 대한 신념을 말하면 교회는 말씀에 관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교회)는 그의 옛 창조(우주)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교회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말씀으로 교회를 부양하시고 유지하며 지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개혁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홀(笏)이며 교회를 기르시는 음식이다.

4. 목사직에 대한 신념

현대교회에 있어서 전문적인 기독교 사역의 성격과 기능들에 대한 불확실한 점이 많다. 우선 서양의 국가들에서 일찍이 목사들이 누렸던 사회적 특권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또한 교회에 의해 개척된 박애 활동(의료, 교육, 사회복지 등)이 국가로 양도되었다. 또한 주요 성령운동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신약의 교리가 ‘교회의 모든 지체는 각각의 은사를 받았으므로 그에 따르는 각각의 성직을 받았다’ 라는 교리적 추론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전문적인 성직이 더 이상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목사가 지나치게 많다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이 오늘날 목사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는 경향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그의 교회에 감독자들을 두시며 그들로 하여금 교회 조직상의 영구한 특징이 되게 하셨다는 신약의 가르침을 재천명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딤전3:1]"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에게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고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고 하셨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인다는 것은 교회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본질적으로 교사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자격 중에 잘 가르쳐야 함[딛1:9;딤전3:2]을 명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목사가 양무리를 먹이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목사는 애석하게도 연구보다는 사무에, 성경보다는 전화에 매달리는 행정가들로 처세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사도들이 행한대로(행6:4) 최우선적으로 ‘기도와 말씀의 사역’을 확립한다면 분명히 교회에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5. 설교에 대한 신념

진실한 설교는 모두 해설적 설교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해설한다는 것은 본문으로부터 거기에 있는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것이다. 해설자는 닫혀있는 것을 보이도록 열고 불분명한 것을 명백히 하며, 매듭지어 있는 것을 풀고,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것을 펼친다. 해설의 반대는 ‘속임’이다. 속임은 본문에 없는 것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 해설적 설교의 유익을 살펴보자

첫째, 해설은 우리의 한계를 설정한다.

해설은 우리를 성경 본문에 한정되므로 자신의 견해나 세속적 문헌이나 정치적 발언 또는 종교적 서적등으로부터 끌어낸 구절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본문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

둘째, 해설은 성실을 요구한다.

칼빈이 죽기 한달 전인 1564년 4월 말경에 칼빈은 제네바의 목사들에게 고별 인사를 하면서 ‘나는 성경의 한 구절도 더럽히지 않았으며 내가 아는 한에서는 왜곡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비록 세밀하게 연구하였을 지라도 그 의미가 난해할 때는 임의대로 해석하지 않고 언제나 그 의미가 단순해지도록 연구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영감된 성경본문 앞에 학습자의 태도로 성실히 연구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셋째, 해설은 함정을 확인한다.

해설자의 결심이 그의 본문에 충실하고자 할 때에 나타나는 주요한 두 가지의 함정은 부주의와 불충분이라고 불리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부주의한 해설자는 한계선을 넘어서 자신의 상상을 따라 감으로써 본문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다. 불충분한 해설자는 여전히 본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 사실상 그는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곡해한다. 결국 성실한 해설자가 되는 것이 이 함정을 피하게 한다.

넷째, 해설은 우리에게 설교에 대한 자신을 준다.

[벧전4:11]"(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이 말씀처럼 우리가 우리의 견해나 틀리기 쉬운 인간의 견해들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아주 자신 없이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실과 정직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