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성욱교수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 관련된 질의 응답 / 정성욱목사

새벽지기1 2016. 3. 2. 06:45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도 달리 부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우선 탕자를 중심으로 이 비유를 본다면 탕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아버지를 떠나 죄에 빠져 살다가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돌아 옵니다. 이것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요.

 

아버지를 중심으로 보면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고 나간 아들에 대한 사랑의 불을 끄지 아니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며, 돌아오는 아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참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지요.

 

비유라는 것은 어떤 핵심 포인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해서 위의 두 가지 포인트를 배울 수 있다면 이 비유는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바로 위의 포인트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일 이 비유에 다가 구속사 전체 또는 대속의 교리 전체를 끼워 맞추려고 한다면 범주 착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이 비유에 억지로 한 번 끼워 맞추어 본다면 아버지가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적 정당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 뒷 부분에 큰 아들이 집나간 동생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께 불평을 합니다. 이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았고, 잃었던 아들을 찾은 것 아니냐 하면서 큰 아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행위를 변호합니다. 바로 이 포인트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정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면, 그 맥락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 이야기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억지스럽다는 인상은 결코 지울 수없는 것이죠. 따라서 비유의 해석을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