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십계명을 거울 삼아 2

새벽지기1 2015. 10. 26. 20:42

 

탐욕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라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20:4)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폭력의 뿌리

  ‘아이돌’이라는 말이 나이 어린 연예계 스타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이 단어는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우상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모양’ ‘형상’을 뜻하는 에이도스(eidos)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있는 ‘헛것’을 뜻하는 에이돌론(eidolon)이다. 나중에 에이돌론은 성경의 하나님과 무관한 이교신의 형상을 일컫는 단어로 통용되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칭 타칭 아이돌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인기가 포말과 같은 것임을, 스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고백하는 셈이다. 


  우상이라는 단어를 ‘편견’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 것은 영국의 철학자겸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었다. 그는 인간을 암매暗昧의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넷으로 정리했다. 극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실재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눈을 가려버린다. 우상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우상숭배라는 말은 단순히 ‘헛것’이나 ‘편견’을 지칭하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우상숭배’라는 말이 발화되는 순간 우리 속에서는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어떤 터부의 경계를 넘은 듯 몸은 움츠러지고 숨은 가빠진다. 모든 단어에는 그 단어가 헤쳐 나온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다. 행태에만 아비투스(habitus)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에도 아비투스가 있다는 말이다. 우상숭배라는 말은 한국교회사에서 아주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전래 초기의 조상 제사 문제는 물론이고,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궁성요배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 논쟁은 많은 이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다종교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타종교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상에 붉은 색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단군상을 잘라내고, 사찰을 돌며 땅 밟기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권 국가에 들어가 대대적인 전도 집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것을 신심행위로 간주한다. 충돌이 빚어지면 그것은 신앙에 대한 박해로 받아들인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와 신앙이나 신념체제가 다른 이들에게 ‘비진리’라는 찌지를 붙인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폭력의 뿌리가 아니던가?


허망의 열정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상’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러 민족들이 자기들의 부족 신으로 섬기기 위해 돌, 나무, 금 등으로 만든 신상이다. 믿는 이들이 사라져 신들도 사라져버렸지만 돌로 만든 신상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도처에 서있다. 만신전(Pantheon)에 모셔졌던 신들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우상을 만드는 것일까? 삶의 모호성 때문이다. 삶에는 우리의 경험과 이성으로 파악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처리할 수 없는 생의 어둠 혹은 한계상황 앞에서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욥의 절규를 생각해보면 된다. 욥은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을 수굿이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런 한계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는 객관적 대상물을 만들어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호함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간 모세의 귀환이 늦어지자 불안감에 휩싸인 히브리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을 이끌어 달라고 기도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들곤 한다. 누군가를 섬기지 않고는 자기 속에 스멀스멀 기어드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섬길 뭔가를 필요로 한다. 연예계 스타나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이들이나, 돈이나 출세 혹은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나 내면의 풍경에는 별 차이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공간화하고 싶은 열망이 곧 우상을 만드는 마음이다. 자기 이름을 딴 기념관을 짓거나 웅장한 예배당을 지으려는 것도 어찌 보면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보려는 허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경은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요, 무지한 자들이니, 마침내 수치만 당할 뿐”(렘44:9)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까닭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사44:18)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곧 우상의 뿌리인 셈이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우상의 허망함을 이렇게 조롱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 이루신다. 이방 나라의 우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며,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한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나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우상과 같이 되고 만다."(시115:3-8)


놀랍지 않은가?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나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우상과 같이 된단다. 놀라운 통찰이다. 우상은 본래 허망한 것이니, 우상과 같이 된다는 말은 허망함을 추수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맥락에서

  이제는 우상숭배 금지를 십계명의 삶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20:4)고 엄히 이르신다. ‘만들다’라고 번역된 이 동사는 ‘새기다’ 혹은 ‘쪼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평범한 말일 수 없다. 여러 해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와 거대한 신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채석장에서 거대한 돌이 선택되면 일꾼들이 양옆으로 나란히 앉아 정으로 돌을 쪼는 광경이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리는 일이었다. 정과 망치를 잡을 수 있는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채석장에 앉아 뙤약볕을 견디며 돌을 쪼는 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죽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일 것이다. 


  히브리인들 모두가 채석장에서 일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국의 위계질서의 맨 밑바닥에 처해있던 이들의 삶은 대체로 유사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옛 신전 건물을 볼 때마다, 거대한 신상들을 볼 때마다 그곳에 묻은 노예들의 땀과 피가 보이는 듯하고, 그들의 눌린 함성이 들리는 듯하지 않던가? 종교를 빌미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적 삶에 묶어두는 종교는 악마화된 종교, 무너져야 마땅한 종교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에는 피의 기억이 배어 있다. 출애굽기는 제단을 만들 때는 흙으로 쌓으라고 권한다. 기어코 돌로 쌓으려거든 다듬은 돌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돌에 정을 대면, 그 돌이 부정을 타게 된다”(출20:25)는 게 그 이유이지만, 속뜻은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늘의 교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야훼의 이름으로 야훼를 부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정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거룩함으로 호명되어야 할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 종교의 타락은 종교적 언어가 본래의 뜻을 상실하면서 시작된다. 기표(씨니피앙)와 기의(씨니피에)의 분리야말로 불신사회의 뿌리이다. ‘함부로’라는 말은 그 극단적 분리를 지시하는 말이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차마 발음할 수 없었기에 네 개의 자음으로만 표기했다. 이름은 곧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짝>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남자 1호’, ‘여자 1호’로 불린다. 뭔가 암시적이지 않은가? 상대의 스펙과 매력을 확인하며 서로를 호명하기 이전까지 그들은 익명 속에 머무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맨 먼저 부여되는 것이 수인번호이다. 군에 입대하는 순간 한 존재는 군번으로 환원된다. 이름을 박탈하고 번호를 부여함으로써 강자들은 그들을 처리하기 좋은 대상으로 만든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호명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것이 ‘꽃’이 된다. 호명행위는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현현하신 하나님께 모세는 이름을 묻는다. 이름을 알지 못하면 관계도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존재 전체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감추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 히브리의 시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다양한 은유로서 표현했다. ‘목자, 피난처, 빛, 산성, 요새, 용사, 능력, 피할 바위, 구원의 바위, 분깃, 힘…’. 성경을 읽다가 이런 은유를 만나거든 잠시 멈추어 서서 그런 은유가 발설된 삶의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어둠 속에 유폐된 경험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빛’으로 고백할 수 없을 것이다. 적의를 품은 이들에게 에워싸여 본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을 ‘피난처’라 고백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해 볼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능력’이라 고백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종교적 언어가 신비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용되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할 때, ‘함부로’라고 번역된 단어의 기초적 의미는 ‘공허하게, 헛되이, 불성실하게, 경솔하게’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관습적으로, 공허하게 발설하는 것처럼 큰 불경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 때문에 그 이름이 모욕을 당한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히고, 우상을 섬겨 땅을 더럽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예언자들은 그런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주의 백성이지만 주의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라고 하였다.“(겔36:20).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도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욕망의 씨앗을 심어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종교 상인들, 말씀의 해석권을 독점하려는 종교 권력,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 말이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들의 군복에는 ‘Gott mit Uns'(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함부로 오용되고 있다. 정녕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가 된 것일까?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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