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십계명을 거울 삼아 4

새벽지기1 2015. 10. 26. 20:44

 

살인하지 말라


"남에게 희생을 당할/충분한 각오를 가진/사람만이 살인을 한다/그러나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 가량의/취객들이 몰려들었고/집에 돌아와서/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김수영, <죄와 벌> 전문)


김수영의 시를 볼 때마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의 화자는 길거리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때렸다. 놀란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비는 내리고, 취객들은 몰려들고, 예기지 않은 사태에 놀라 그는 도망치듯 현장을 떠나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도 마음은 편치 않아서 벌어진 사태를 가만히 복기해본다.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울고 있던 아이는 지금 어찌 되었을까,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는 우리의 이런 상식을 무참하게 깨뜨린다. 시의 화자를 괴롭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혹시 아는 사람이 그 현장을 본 것은 아닐까?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현장에 두고 온 지우산이 아깝다고 내처 말한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게 사람이다. 고통은 표백되게 마련이고, 표백된 고통 속에는 타자의 자리가 없다. 시인은 끈질기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중심성을 심드렁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 시의 제목을 '죄와 벌'이라고 정했을까? '죄'는 알겠는데 '벌'은 불분명하다. 혹시 그런 자기 중심성이 곧 '벌'이라는 것일까?


20세기를 거쳐 21세기 초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도처에서 들려오는 분쟁과 테러의 소식을 덤덤하게 듣는다. 일상화된 폭력과 테러가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킨 탓이다. 매스컴은 테러로 죽어간 사람들을 재빨리 숫자로 환원해버린다. 숫자로 기호화된 사람들은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폭력은 그렇게 해서 일상에 깊이 뿌리를 내린다. 아이들이 즐기는 전자오락 게임에서도 생명은 속절없이 유린당한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총을 쏘아 쓰러뜨리면서 쾌감을 느낀다. 전자오락 뿐인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도 피가 흥건히 흐른다. 가상현실로서의 피 흘림에 익숙해진 이들은 현실 속의 피 흘림에 대해서도 낯설어 하지 않는다.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생명 경외를 설파했던 앨버트 슈바이처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모든 유기체는 탄생의 순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순간도 있다.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있는 절친이다. 문제는 주어진 생명을 한껏 살아내지 못하고 중도에 폭력적으로 차단당하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의 뿌리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의 세계로 부르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에 최소한의 폭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른 생명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창조 세계를 잘 돌보라는 위임을 받았다. '돌본다'는 것은 북돋고, 어루만지고, 격려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고백은 얼마나 장엄한가. 그것은 힘과 폭력에 기반한 제국의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이 아닌가? 힘이 없다 하여, 배운 것이 없다 하여, 피부색이 다르다 하여,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다 하여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던 사람들, 피라미드 체제의 맨 밑바닥에서 굴종을 운명처럼 여기고 살던 사람들로부터 터져 나온 소리. '우리도 존엄한 존재이다', '우리 생명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인권선언이 아닌가?


"살인하지 말라." 늘 목숨의 위협을 받던 이들에게 들려온 이 계명은 하늘의 명령이지만, 동시에 땅의 사람들의 외침이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나일강 물을 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이적이 아니라 실상을 드러냄이었다. 애굽의 힘과 풍요로움의 상징인 나일강이 실은 히브리들이 흘린 땀과 피라는 사실을 말이다. '살인하지 말라'. '우리도 사람이다.' 가슴 절절한 고통이 있었기에 이 계명은 하늘의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은 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사로운 피의 보복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민35:33-34)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다. 그 땅에서 이웃을 괴롭히고 학대하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신체에 가하는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고, 육체적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사람을 실제로 죽인 사람만이 살인자인가./아닐 것이다./예컨대 말 한 마디, 눈초리 하나도 살인적일 수 있을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살인적이고/어떤 진실도 살인적이다./어떤 냉담도 그렇고/어떤 열정 또한 그러하다."(정현종, <살인자> 부분) 이렇게 본다면 누구도 제6계명을 지켰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면할 수 없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살인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생명을 살리라"는 말이 된다. 그 생명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 세계를 다 포괄한다.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는 피조 세계를 돌보는 것 역시 이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을 역전시키기 위해 부름받은 이들이다. 욕망을 신처럼 섬기기에 전쟁터처럼 변해 버린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고 북돋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처럼 거룩한 삶이 또 있을까?


간음하지 말라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일어나서 온 성읍을 돌아다니며 거리마다 광장마다 샅샅이 뒤져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겠다'고 마음 먹고, 그를 찾아 나섰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못 보셨어요?" 하고 물으며,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나의 임을 만났다. 놓칠세라 그를 꼭 붙잡고, 나의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서 부탁한다. 우리가 마음껏 사랑하기까지는, 흔들지도 깨우지도 말아다오.(아3:1-5)


참 노골적이다. 그런데 불쾌하지 않다. 가슴이 살짝 설레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아가서를 두고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그리움과 숨바꼭질을 에로틱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해도 성을 금기의 영역 속에 유폐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가서는 독특하다. 인류에게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성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향연Symposium>에서 아리스토파네스를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남과 여, 여와 여, 남과 남이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인간의 힘이 세지고 오만해지자 신은 그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한 몸이었던 자기의 반쪽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 애틋함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결핍이고 결핍은 충족을 지향한다. 세상이 살짝 들떠 있는 것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그 갈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로스 혹은 사랑은 흘러넘치기 쉬운 위태로운 열정이고, 그 열정은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도 있기에 제도는 그것을 금기 속에 가둬두곤 했다. 그런데 어떠한가? 금기가 강력할수록 위반에 대한 욕구 또한 강력해지지 않던가? 금지가 없다면 위반 또한 없을 것이다. 삶은 금지와 위반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현대 세계에서 광고는 그 흔들림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광고에 성적 코드가 빈번히 등장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람들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욕구 혹은 욕망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정욕을 사랑과 친밀함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정욕은 일쑤 대상을 물화함으로 비인간화시키지 않던가. 성이 상품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관계의 신비는 가려지거나 외면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첫 사람이 쓸쓸해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돕는 배필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이쉬'(남자)와 '잇샤'(여자)는 상호부조의 공동체이다. 여성주의자들 가운데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가부장적 세계가 학습시킨 것이라면서 본래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둘 사이의 본래적인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편이 되었든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정은 서로 다른 두 주체가 만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기초 단위이다. 결혼은 덧없이 변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언약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이든, 두 주체 간의 언약이든 그 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 가치는 상대에 대한 신실함이다. 요즘 결혼식이 엔터테인먼트처럼 변해가는 현실은 참 유감이다. 의미보다 재미를 우위에 두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결혼의 핵심은 역시 서약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약을 지켜감을 통해 두 영혼은 생의 더 깊은 곳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참 낯설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성 담론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급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만해 한용운은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서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히브리들의 경험은 어디에서나 보편적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상인에게 붙잡혀 아메리카로 팔려갔던 흑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은 강제노역은 물론이고 주인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기도 했다. 애굽에서 하층민으로 살아온 히브리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라". 이 노래가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힘 있는 이들의 욕망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경험을 다반사로 했을 터이니 그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이루어 살게 될 새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것이다. 그러니 이 계명은 남녀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상호윤리를 넘어, 강자들(권세자든 남성이든)의 폭력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강자들에 의해 가정이 유린되고 성이 유린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이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성적 담론은 더 이상 사생활의 은밀한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각종 사진과 영상자료들은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은 더 이상 서약에 근거한 항구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결합하고, 필요가 해소되면 쉽게 헤어질 수도 있는 잠정적인 공동체일 뿐이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경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로 여기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자연스러운' 혹은 '아름다운'으로 포장된 이런 담론은 뭔가를 은폐하고 있다. 그것은 벌거벗은 욕망이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은 넘치게 마련이고, 그런 넘침은 주변을 황폐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작동하고 있는 과도한 욕망이 이미 간음이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라캉이나 프로이트 혹은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빌리지 않고도 욕망이 인간의 이성과 행동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욕망이 활성화되는 순간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충족을 지향하는 욕망은 타자를 도구화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물론 욕망 그 자체가 문제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과도함이다.


출애굽의 맥락에서든 오늘 우리 삶의 맥락에서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타자를 물화시키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과도한 욕망은 자칫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니 말이다. 그것은 타자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도 망가뜨리는 일이니 이중의 소외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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