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십계명을 거울 삼아 5

새벽지기1 2015. 10. 26. 20:44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품삯이 소리를 지른다

도둑과 관련된 속담이 참 많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은 다 아는 말이고, '도둑놈 개 꾸짖듯 한다'는 말은 남이 알까 두려워 입 속으로 우물쭈물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도둑놈 딱장받듯 한다'는 말은 남을 몹시 욱대길 때 쓰는 말이고, '도둑놈 소 몰 듯한다'는 말은 당황하여 서두르는 모양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요즘은 이런 속담을 쓰는 이들이 별로 없지만 속담이라는 것은 세태를 반영하는 법이니 도둑이 많기는 많았나 보다. 속담 속에 반영된 도둑들은 대개 생계형 도둑이었던 것 같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남의 담을 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들은 오늘 거리를 활보하는 큰 도둑들에 비하면 겨우 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가장 큰 도둑질로 여긴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공(公)을 사유화(私有化)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공공재인 땅을 임대해주고 막대한 지대수입을 올리는 이들도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잠시 그 땅 위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덮인 하늘, 백화 현상이 일어나 생태계가 파괴된 바다 연안沿岸, 흐름의 길이 막혀 썩어가는 강, 가축들의 사료작물을 심기 위해 파괴되는 열대 우림 등은 큰 도둑인 사람에 의해 약탈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덟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막연히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계명의 삶의 자리는 '사람 도둑질'이 일상화된 현실이었다. 성경이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로 내세우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처럼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은 강자들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빚에 몰려 종으로 전락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일체의 행위는 제8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미국의 한 지하철역에서 죽어가는 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특종을 얻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기자의 행위가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변형된 형태의 도둑질은 우리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물건을 사고팔 때 속임수를 쓰거나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나, 마땅히 줘야 할 품삯을 미루거나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다. 아르바이트생들의 임금을 떼먹는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의 불안한 신분을 이용하여 임금을 착취하는 사람들, 제3세계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윤을 불리는 다국적 기업들도 실상은 제8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재벌들이 하도급업체에게 비용 부담을 떠넘기는 행위, 피라미드식으로 물건을 대리점에 떠넘기는 행위, 큰 자본을 가진 이들이 영세상인들의 상권까지 파고들어오는 행위는 모두 변형된 도둑질이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일러 합법화된 절도체계라고 말했다. 외경의 집회서는 궁핍한 이들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행위를 살인이라고까지 말한다.


“궁핍한 이들의 빵,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목숨이니 그것을 빼앗는 자는 살인자다. 이웃의 밥줄을 끊는 자는 그를 죽이는 자고 일꾼의 품값을 빼앗는 자는 그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다.”(집회34:25-27)


상호부조 체계가 무너진 사회일수록 도둑질이 성행한다. 돈이 인간의 욕망을 과잉대표하는 세상일수록 도둑질은 일상화되게 마련이다. 삶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가르치는 세상은 도둑질을 권하는 세상이다. 나눔과 돌봄이 사회의 저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절제와 자족의 삶을 즐거이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도둑질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눔보다 축적에만 마음쓰며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던진 야고보의 말은 통렬하기 이를 데 없다.


“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고, 여러분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할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으며,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약5:1-5)


거짓말이 다반사가 된 세상

아홉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 하지 말라'이다. 거짓 증언은 법정에서 자주 벌어진다. 송사가 벌어지면 이해 당사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을 찾게 마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백할 때는 굳이 증인을 세우지 않아도 되지만, 양측의 증언이 모순되거나 충돌할 때는 증인을 세울 수밖에 없다. 증인은 참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법정은 증인들에게 '사실만을 증언하겠다'는 선서를 하게 한다. 사실에 입각할 때 그 증언은 참되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반영할 때 그 증언은 참되기 어렵다. 성경은 거짓 증언이 신뢰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작은 여우임을 알기에 거짓 증언을 엄중하게 금지한다. 


"너희는 근거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또한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출23:1-3)


중상모략과 무고誣告가 범람하는 사회, 말의 진실성이 의심받는 사회는 기초부터 흔들리게 마련이다. 어느 현직 판사는 증인들을 세우기는 하지만 그들의 증언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매우 적다고 말했다. 원고나 피고가 세운 증인의 말은 '증언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사회가 불신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빌어 말하자면 시각적·청각적 기호인 시니피앙(signifiant)과 그 의미 내용인 시니피에(signifie)가 분리되고 만 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는 공감과 연대의식이 사라진 사회이다. 


말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진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거짓증언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봇은 신이 씨를 뿌린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비옥한 땅에서 조상 적부터 가꿔온 포도밭은 그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그 포도원이 아합 왕의 여름 별장 가까운 데 있었다는 것이 불행의 단초였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포도원을 손에 넣고 싶었던 아합은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줄 터이니 포도원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왕의 요구를 당차게 거부했다. 차마 조상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그 포도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합은 몸져 누웠다.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지 않던 사람인지라 충격이 컸을 것이다.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일을 꾸몄다.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쇄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그 편지에는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게 하시오. 그리고 건달 두 사람을 그와 마주 앉게 하고,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한 뒤에,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시오."(왕상21:9-10)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성 안에 있던 원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이 편지에 쓴 그대로 하였다. 가진 것이 많기에 권력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이세벨의 음모를 실행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무고한 나봇은 그렇게 죽었고, 아합과 이세벨은 자기들의 뜻을 이뤘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일로 인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합 일족이 참혹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바꾸면 '참된 말을 하라'가 될 것이다. 무엇이 참된 말인가? 살리는 말과 세우는 말이 아닐까? 우리 현실은 어떤가?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이 넘치고, 세우는 말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말이 넘치지 않는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제멋대로 찌지를 붙이는 일이 많다. '좌파'니 '종북'이니, '우파'니 '수구'니 하면서 우리는 반대 진영에 속한 이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아니라 그들을 갈라놓는 칼이 되이 말았다. 었다.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맨발로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채찍에 맞은 자국은 피부에 남지만 혀에 맞은 자국은 골수에 남는 법이다. 말에 맞은 상처는 잘 아물지도 않는다. 말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말을 다루는 이들의 책임이 크다. 언론과 교육과 종교의 언어가 타락했다. 진실과 애린의 체에 걸러내지 않은 말은 폭력이 되기 쉽다.


“많은 말을 즐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비록 경탄할 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내부는 비어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라. 침묵은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열매를 너희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토마스 머튼)

“내 생의 순간마다 나는 침묵이 최대의 웅변임을 인식한다. 부득이 말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적게 하라.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하라.”(마하트마 간디)

“사람은 태어날 때에 그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숫타니파타, 657)


탐심이라는 바벨론 포로생활

열번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탐내다'의 사전적 정의는 '몹시 가지고 싶은 욕심을 내다'이다. 이것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이다. 계명은 이웃의 집, 이웃의 아내, 남종, 여종, 소나 나귀 등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저절로 일어나는 욕망을 어찌하란 말인가? 인간은 본래 에로스적 존재가 아니던가?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풍요의 신인 아버지 포로스와 빈곤의 신인 어머니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로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닮았다. 그렇기에 그는 때로는 자기 충족적이지만, 때로는 결핍감 속에서 허덕이기도 한다. 에로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갈망한다. 인간은 에로스이다. 결핍과 갈망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그렇다면 탐내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욕망의 죽음은 어쩌면 의욕 상실과 유사하니 말이다. 문제는 과도함이다. 과도한 욕망은 자기 파괴적인 동시에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 작동하기 십상이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영의 전시장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 세상은 인간의 욕망을 추동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소비자로 취급한다. 자본주의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새 것 강박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탐욕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으로 포장된다. 현대인들은 삶을 위한 필수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그 때문에 늘 새롭게 태어나는 기호를 붙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분주해질수록 삶의 질은 떨어진다. 욕망의 포로가 된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이다. 피로 사회, 성과 사회, 위험 사회, 팔꿈치 사회,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위축된다. 


욕망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경우보다 다른 이들(매개자)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일쑤 이웃이 소유한 것을 나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할 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획득하려 하기도 한다. 성경은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을 허망한 것이라 말한다. 인간의 그 허망한 열정으로 인해 세상은 어지럽다. 시인 최승호는 <몸>이라는 시에서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이렇게 노래한다.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탐심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동료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게 된다. 비인간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탐심이라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길은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을 따라다니기보다는,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헤아리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을 한껏 누리려 할 때 욕망의 죔쇠는 풀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망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이들의 공동체 속에 머물러야 한다. 돈으로 매개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덜 가지고도 더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욕망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 교회는 그런 삶이 구현된 자리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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