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십계명을 거울 삼아 3

새벽지기1 2015. 10. 26. 20:43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기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출20:8-10)


한병철 교수는 현대세계를 '피로사회'라는 말로 요약했다. 사람들이 <피로사회>라는 그의 책에 크게 공감한 것은 그 책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제목 자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거리를 걷고 있는 이들 중에 얼굴빛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 사는 일이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를 만나기 어렵다. 함석헌 선생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형용한다. '우멍한 얼굴, 뻔뻔한 얼굴, 간사한 얼굴, 실망한 얼굴, 병에 눌린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 얼굴 하나 보고 가자는 것이 인생인데 왜 다들 이렇게 되었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분주하게 몰아치지만 우리의 표정이 증명한다. 우리가 점점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함석헌 선생이 그리는 참 고운 얼굴은 어떤 것인가?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아,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어디서 이런 얼굴과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예토穢土에서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일일까? 그렇다면 인생은 결말이 정해진 비극인가? 에덴 이후의 세상, 인간이 한시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세상에서 마치 하늘을 계시하듯 얼굴빛 환한 사람, 눈빛 맑은 사람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덴의 동쪽, 곧 가인의 세계에서 인간은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고 산다. 불안하기에 달리고 또 달린다. 불안의 대용물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돈, 명예, 권세를 향한 열정은 허망의 열정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근본적 불안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불안', '뿌리 뽑힘', '안식 없음',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 실존의 표상이다. 그래서 전도서의 기자는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고 말했던 것이리라. 이쯤 되면 현실에 마법을 걸어 숭고하게 만들고 싶은 불같은 열망을 품었던 헤르만 헤세에게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불안을 숙명으로 알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에게 한 음성이 들려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 물론 이 명령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몸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지고, 욱신거리는 육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낼 때에도 노동을 그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주어진 이 계명은 그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히브리인들은 일을 멈추고 쉬라는 계명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쉼에서 예외인 존재는 없다. 나와 가족은 물론, 종들과 가축들과 나그네까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 다른 거주지에 체류하게 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만해 한용운의 시를 빌어 말하자면 '민적이 없어 인권도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언급된 대상의 순서가 암시하듯 가축보다도 낮게 취급을 받던 이들이다. 안식일법은 그들조차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이란 샤바트란 말의 번역어이다. 아카드어로 '신의 심장이 쉬는 날'이라는 뜻의 '샤파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용어는 '쉼'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신의 리듬 속에 잠기는 날임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계명은 '해야 한다'(미츠봇 아세이)와 '하면 안 된다''(미츠봇 로타아세)는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식일에는 무엇보다도 즐거워해야 한다. 삶을 경축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이다. 하지만 안식일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 또한 많다. 하지 않음의 핵심은 뭔가를 변형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번거로운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앞서도 암시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 중 하루는 일체의 인위적인 일들을 그치고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겸허해진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안식이란 말 그대로 숨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숨이 가지런해 질 때 밖으로 향했던 시선은 내면을 향하게 되고, 비로소 성찰이 시작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그 길을 바로 걷고 있는가?' 안식일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며 살던 삶을 근원 앞에 세우라는 요구이다. 


숨을 제대로 쉴 줄 아는 이들이라야 타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숨을 쉴 줄 모르는 이들일수록 자신과 타자들에게 폭력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일이 중심이 될 때 사람은 수단이 된다. 이보다 더 큰 폭력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자칫하면 타자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안식일 준수는 그런 마음의 습성을 끊어내는 일이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사람들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이렛날을 성별함으로 역사를 넘어선다"고 말했다. 안식일은 노동의 엿새를 감싸안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달리 말하자면 안식일이란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의 영원에 비끌어매는 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안식일은 일주일 중의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을 성화하는 시간 속의 성소이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안에 고향을 마련하는 일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20:12) 


안식일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살라는 뜻이었다면, 부모 공경 계명은 우리의 존재가 선물임을 자각하고 살라는 초대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즉시 유교적 효의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효孝와 더불어 충忠이 떠오르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사실 살아계신 부모와의 관계는 미묘한 이중감정을 자아낸다. 부모는 때로는 삶에 지칠 때마다 돌아가 안기고 싶은 고향인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훨훨 자유롭게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잡아채는 질곡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연장된 청소년기를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정규직이 꿈'이라고 힘없이 말하는 젊은이들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 


어느 신학자는 어머니를 일러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창조행위라는 뜻일까? 한국인들이 명절 차례상에 빠뜨리지 않고 올리는 과일 중 셋은 매우 심오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대추는 후손들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이고, 접붙여서 얻는 감은 좋은 스승을 만나라는 축원이고, 밤은 뿌리를 잊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밤은 땅에 심겨져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결실할 때까지 애초의 밤의 형체가 남아 있다 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모는 생명의 전달자인 동시에 신앙적 기억의 전달자이기도 하다. "나중에 당신들의 자녀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당신들에게 묻거든, 당신들의 자녀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신6:20-21a) '이렇게'의 내용은 물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이다. 유대의 가족들은 유월절을 맞기 위해 집안에서 누룩을 제거하고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한 후 촛불을 밝히고 만찬을 즐긴다. 만찬에 앞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 오늘 밤이 다른 날과 다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는 유랑자로 살았던 조상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가르친다. 기억은 그러한 의례를 통해 내면화되는 것이다. 기억의 지속이야말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유지의 관건이다. 오늘 이 땅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부모 세대의 삶의 이야기가 자식 세대에게 전달되지 않아 장기지속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삶이 즉흥적이고 피상적이고 뿌리 뽑힌 듯 휘뚝거리는것도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또 다른 맥락에서도 살펴야 한다. 부모로 지칭되고 있는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육친을 뜻하지만, 그 맥락을 넓히면 늙어가고 있는 이들 혹은 사회적 약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젊은 날의 기력을 잃고 서서히 생의 황혼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모든 생명의 운명이지만 그런 연약함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고 통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생의 절정에서 물러나 자기 뜻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사태를 지켜본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일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을 효율성과 쓸모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 혹은 노인들은 깊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약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회는 해체에 직면한 사회이다. 하찮다 하여 외면하고, 약하다 하여 무시하고, 돌보아 줄 이가 없다 하여 짓누르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하여 착취하고, 비정규직이라 하여 차별하고, 실업자라 하여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상은 내부에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격이다. 자기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살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들의 있음 자체를 고맙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속에 담긴 사회적 과제이다.

전도서 기자인 코헬렛은 젊은이들에게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전12:3-4)

"나 아홉 살 때/뒤주에서 쌀 한 됫박 꺼내시던 어머니가 갑자기/"내 알통 봐라" 하고 웃으시며/볼록한 알통 보여주셨는데.//지난 여름 집에 갔을 때/냉장고에서 게장 꺼내주신다고/왈칵 게장 그릇 엎으셔서/주방이 온통 간장으로 넘쳐 흘렀다./손목에 힘이 없다고,/이제 병신 다 됐다고,/올해로 벌써 팔십이라고."(서홍관, <어머니 알통> 전문)


히브리의 한 시인의 마음과 한국의 한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곡진하게 만나고 있다. '그 때'는 누구에게나 온다. 젊음은 지연된 노년이라 할 수도 있다.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말은 자기 삶이 선물임을 알라는 말일 것이고, 자기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라는 말일 것이고,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때를 한껏 살아가라는 말일 것이다. 자기 인생의 때에 걸맞지 않는 삶을 기획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끝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애착이 강할수록 허망함 또한 깊어진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이들은 우리 생명이 신비임을 그리고 삶이 '고마움'임을 알게 된다. 아, 그리고 사족 하나.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는 무엇일까? 부모보다 정신이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좋은 말씀 > 김기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 산책 1  (0) 2015.10.26
십계명을 거울 삼아 5  (0) 2015.10.26
십계명을 거울 삼아 4  (0) 2015.10.26
십계명을 거울 삼아 2  (0) 2015.10.26
십계명을 거울 삼아 1  (0) 201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