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십계명을 거울 삼아 1

새벽지기1 2015. 10. 26. 20:40

 

오늘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하늘의 소리에 접속하다

언제 보아도 허허롭기 이를 데 없는 광야, 늙은 목자 모세의 시선도 광야를 닮았다.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 가슴에 들끓던 분노와 서러움의 감정은 어느 결에 잦아들고 힘겹지만 평온한 일상이 그의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십보라와의 사이에 아들 게르솜까지 태어났으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풀을 뜯으며 어슬렁어슬렁 나아가는 양떼를 따라 가다 보니 어느덧 호렙산 기슭이었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눈부신 때였다. 저만치에 있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이 보였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더러 보았던 광경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심드렁하게 다가서는 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떨기나무는 환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재가 되어 스러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쭈뼛쭈뼛 그 빛을 향해 다가설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세야, 모세야!” 얼떨결에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빛 속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물론 거룩한 곳은 그 공간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곳이야말로 신성한 땅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광야의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던 신을 벗어야 했다. 그가 벗어야 했던 신은 어쩌면 그의 자아였을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는 신 앞에 설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 일상을 찢고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에 접속된 사람은 옛 삶을 계속할 수 없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호렙산에서 만났던 그 빛나는 떨기나무는 허허로운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던 모세를 거대한 역사의 격류 속으로 부르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털어놓으신다.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는 당신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고난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새로운 땅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값없는 은총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은혜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주님의 역사 섭리에 동참하라는 초대가 아닌가. 


하지만 가슴 벅찬 초대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초대에 응하는 순간 어렵사리 유지하고 있는 평안함이 깨지기 때문이다. 모세는 주저한다. 그리고 한사코 역사의 격랑에 뛰어들지 않으려 한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더 할 말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울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 있다. 인생은 내가 선택한 길만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의 부름에 응답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동의를 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이집트에 살고 있던 히브리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숙명론의 굴레를 벗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 메뚜기, 개구리처럼 보잘 것 없던 그들이 들고 일어나자 바로의 체제가 흔들렸다. 물론 당황한 바로는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대했지만, 이미 강고한 체제에는 틈이 생겼다. 아홉 번째 어둠의 재앙은 태양신 아몬-레의 아들로 자처하던 바로의 체제에 대한 심판이었고, 마침내 열 번째 재앙이 닥치자 바로는 히브리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들은 할당량의 압박을 받던 애굽을 떠나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 배고픔과 목마름, 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현실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때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에 대한 원망을 낳는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출16:3) 고기 가마라니? 배불리 음식을 먹었다니? 신기루일 뿐이다. 사람은 이런 인식의 착란 속에서 살아간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행진을 계속했다. 광야의 은총이라 할 만나도 먹었고 메추라기로 육식에 대한 허기도 달랬다. 르비딤에서는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로 마른 목을 축였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시내 광야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 이른 것이다. 주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 백성과 맺을 언약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19:5-6)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의 계명을 부과하지 않고 히브리들의 동의를 구하신다. 놀랍지 않은가? 노예노동에 시달리며 단 한번도 자기 의사 결정권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동의 여부를 묻고 계신다. 그들을 주체로 인정한 것이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 평등 공동체의 이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은 탈출 공동체가 바라보아야 할 생의 비전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제1계명

백성들이 동의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할 계명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해방 공동체가 지켜야 할 일종의 삶의 강령이다. 강령綱領의 사전적 정의는 '일의 으뜸되는 줄거리' 혹은 '정당·단체 등에서, 그 기본 목표·정책·운동 규범 등을 정한 것'이다. 강綱은 그물을 버티는 줄인 벼리를 뜻한다. 벼리가 없다면 그물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령領은 옷깃을 뜻한다. 옷깃이 바로 서지 않으면 옷 맵시가 날 수 없다. 강령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제1계명은 십계명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이 계명은 일쑤 타종교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동원되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유일한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지만 사실 고대 세계는 다신의 시대였다. 신들이 많았다는 말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다면적이었다는 말이다. 각각의 신들은 주재하는 지역과 역할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최고신인 제우스의 주재 아래 자기 나름의 장소 혹은 주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헤라는 신성한 결혼과 가정이 수호자였고, 하데스는 지하 세계를 관장했고, 데메테르는 땅에서 돋아나는 곡물의 생장을 관장했다. 헤파이토스는 대장간의 신으로서 기술과 불을 관장했다. 포세이돈은 바다를 지배했고, 넵투누스는 강물을 다스렸고, 히브너스는 사람들에게 잠을 선물로 주었다. 각각의 신들은 죽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인간과 구별되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신을 섬겼다. 집과 건물을 수호하는 성주신, 집안의 액운을 막아주고 재복을 준다는 터주, 부엌을 관할하고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조왕, 장독을 지키는 천륭신, 그리고 출산과 양육을 관장하는 삼신이 떠오른다. 신들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고 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을 타종교나 민속 문화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삼는 것은 이 계명의 삶의 자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계명은 출애굽의 맥락과 분리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계명에서 대조되고 있는 '나'와 '다른 신'이라는 기표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세상에서 짓밟힌 사람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내일에 대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억울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 남에게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이다.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가슴에 자유에 대한 꿈을 심어 주시는 분이시다. 출애굽 공동체는 바로 그런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그 '다른 신'은 제국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신들이다. 가진 자들·힘 있는 이들이 누리고 있는 현상질서를 추인해주는 신들이다. 그 신들은 사람들을 숙명론에 묶어둔다.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신이 품부하신 것이니 수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신들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서 박탈당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그 신들은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약속의 수혜자들은 늘 강자들일 뿐이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은 그런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신앙적 분별이 필요한 때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삶으로는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경건해 보이는 사람이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를 받아 마신 땅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피의 소리를 신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 위로해주고 복된 삶을 약속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이 낳지 못하는 여인들의 한에 깊이 공감하시고 그들의 태를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친히 땅에 내려오시고,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무정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살 권리를 확보해주는 것을 가장 거룩한 행위로 여기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떠한 신을 섬기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시장질서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돈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맘몬'의 신민이 되어 살아간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하구에 모인 갈매기들처럼 사람들은 썩은 생선이나마 얻기 위해 끼룩거리며 돈 주위로 몰려든다. 교회는 번영의 복음으로 사람들의 방향감각을 교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고후4:4) 기가 막힌 일이다. 미국의 신학자인 하비 콕스는 말한다. "인간은 그의 삶을 위한 기구와 기술,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방법과 소유를 위한 분배방법을 바꿀 때 그의 '신'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이제는 '다른 신들' 곧 '거짓 신들'에게 빼앗겼던 우리 마음을 되찾아야 할 때다.


거짓 신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지만, 야훼는 과도한 욕망을 버리라 하신다.

거짓 신은 우리를 예속시켜 옴쭉달싹 못하게 하지만, 야훼는 우리를 해방시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게 한다.

거짓 신은 '너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야훼는 '나는 네가 미워하는 사람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거짓 신은 남보다 앞서는 게 성공이라 말하지만, 야훼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게 참 삶이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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