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욥기 산책 2

새벽지기1 2015. 10. 26. 20:47

 

제2강 시련의 시작(1:1-22)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지요?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사는 게 흐뭇하고 행복하고 그렇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 돼서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인 분도 계신가요? 제 경우는 그저 근근이 살았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좋은 날도 있었고 조금 힘겨운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했습니다. 그러니 큰 사람 되기는 틀렸습니다. 맹자의 고자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몸과 피부를 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곤에 빠뜨리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지금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하나님이 내게 큰 일을 맡기시려는가?' 생각하며 스스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의 영웅 신화의 공통항은 영웅들은 누구나 큰 시련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열 두 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던 헤라클레스입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없었더라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 같은 절창이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40일 동안의 광야시험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만연한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그 깊은 연민이 가능했을까요? 시련과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살다보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불청객처럼 찾아옵니다. 그 불청객으로 인해 인생이 영 망가지고 마는 이들도 있습니다. 거듭되는 시련에 정신이 아예 물크러져서 주체로 서지 못하고 물결치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을까요? 이제 욥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우스 땅'이 어딘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동쪽 지역 어디쯤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우스를 에돔지역으로 소개하고 있기는 합니다(애4:21). '장소성'의 문제는 텍스트 읽기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욥기에서 '우스'는 특별한 맥락을 제공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우스'를 언급함으로 자기가 다루려고 하는 인물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번역어가 참 기가막힙니다. 이름은 남과 나를 구별하기 위해 주어진 기호입니다. 그런데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아카드어로 욥이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라는 뜻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세요? 욥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라는 사나이를 소개하는 말은 간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간결하기는 하지만 왠지 그에 대해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소개문에 드러난 것은 그의 성격적 특질이 아니라 삶의 태도 혹은 지향입니다. 인간은 통전적 존재이지만 편의를 위해 영-혼-육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일은 여러분에게도 익숙할 겁니다. 그 도식을 빌어 말하자면 욥의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은 '육의 욕망'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영이 그의 혼과 육을 이끌고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복된 삶입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1:2-3)


아들 일곱에 딸 셋, 슬하에 10남매를 뒀군요. 재산도 엄청납니다. 그런데 욥기의 저자는 통계학상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이런 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숫자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7은 하늘의 완전수인 3과 땅의 완전수(동서남북)가 더해진 것입니다. 10은 그 둘의 결합수입니다. 자식들과 소유물의 많음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는 말로 수렴됩니다. '자식', '부', '사회적 존경', '경건함'은 히브리 성서에서 하나님께 복받은 자의 징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욥은 복 받은 자 중의 복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예로부터 말해온 '오복'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오복이 뭔지 아시지요? 장수(壽), 물질적 넉넉함(富), 몸과 마음의 평안함(康寧), 도덕적인 삶(攸好德),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考終命)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가족 관계가 좀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벌가 사람들이 재산다툼으로 이전투구를 벌인다는 소식은 이제 별로 뉴스거리도 안 되는 현실입니다. '돈' 혹은 '재산'은 중립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그것을 욕망하는 순간 신의 자리에까지 높여집니다. 그런 현실을 꿰뚫어보셨기에 예수님은 돈을 '맘몬'이라 칭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가족은 좀 다릅니다. 가족 간의 관계가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4-5)


동기간의 우애가 이만하니 욥은 부모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욥의 가족들은 삶을 축제로 즐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욥은 정말 조심스러운 사람이군요. 그는 아들들이 혹시라도 저질렀을지 모를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아들들의 수대로 번제를 바칩니다. 그의 부유함이 경건함을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까지도 바꾸게 마련이거든요. 욥은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혜자입니다. 그런데 조금의 그림자도 없는 이런 조심스런 삶의 행로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이후에 벌어진 일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요? 옛 사람은 가득 참을 유지하려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持滿戒盈)고 가르쳤습니다. 자꾸만 덜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욥의 경우는 이런 상식적 가르침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1장 5절까지가 화창한 봄날과 같은 인생의 정경이었다면, 6절부터 우리는 저 먼 데서부터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발디의 <사계>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5절까지는 '봄'입니다. 새들이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하고 미풍은 살랑거리고 시냇물은 종알거리며 흘러갑니다. 한가로운 푸른 풀밭 위에서 목동은 졸고 있고 개는 멍멍 짖습니다. 6절부터는 '여름'입니다. 북풍이 불어오고, 격렬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때로는 우박이 쏟아져 내리기도 합니다. 물론 천상회의의 장면은 요란스럽다기보다는 조용한 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북풍, 천둥, 우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1:6). '하루'라는 날이 문제입니다. 이 '하루'는 창세기 서장의 '태초'와도 통합니다. 이 날은 특정한 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루' 속에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과 설렘이 담겨 있고, 그 '하루'는 찰라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하고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하는 미정형의 시간입니다. 두 가지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와 섰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천사들일까요?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사탄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탄은 사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사탄은 어둠이어서 빛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당혹스럽습니다. 그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대답을 잠시 미루고 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는 여호와의 물음에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1:7) 영어로는 'to-and-fro', 'up and dow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부지런합니다. 세상 구석구석 가 보지 않은 곳이 없고 모르는 게 없습니다.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대개 부지런하고 정보가 많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방을 쑤시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관계를 어지럽힙니다. 우리가 마음의 중심을 잡고 든든하게 서 있지 않으면 사탄에게 늘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다양합니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샤쿠는 사탄이 마치 먼지처럼 우리 속에 조용히 쌓여 우리를 더럽히고 마비시킨다고 말합니다. 먼지처럼 조용하기에 경계심을 갖고 대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사탄이 매우 위협적인 몸짓으로 다가온다면 방비 태세를 갖출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사탄의 부지런함을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자랑스럽게 물으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 하나님은 욥을 '내 종'이라 칭하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전형입니다. 흠 잡을 것도 없고, 구부러진 것도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선율을 따라 자기 삶을 연주할 따름입니다.


사탄도 욥에 대한 그 평가가 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하는 일은 참소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틈을 만들고 그 틈에 쐐기를 박아 갈라지도록 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습니다. 그는 하와를 유혹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 은근하게 도발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까닭 없이'라는 단어입니다. 사탄은 욥의 경건함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경건함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울타리가 되어 그를 지키시고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주셨으니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사탄은 그 까닭이 될 만한 일이 철회되는 순간 욥의 믿음도 철회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잘 될 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복'이 지나치면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생의 주변부에 몰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생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탄의 도발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까닭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시도하는 일마다 가로막히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서 속절없이 멀어질 때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아까 사탄은 '참소자'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는 사실 우리의 속 생각을 되짚어보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어떤 분을 성인으로 세우기 전에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정확한 용어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위원회 구성원 가운데는 '악마의 옹호자'(devil's advocate)가 포함된다고 합니다. 그의 역할은 사람들의 증언을 부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심을 통해 모순과 오류 그리고 결함을 찾아냅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고통과 실패 그리고 시련이 하는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숨겨진 욕망과 상처를 바로 볼 때 비로소 정직한 자기 인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 사탄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안의 대용물로 우리가 한사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속절없이 스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가 뭘 의지하고 사는 사람인지가 오롯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에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할까요?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이 무고한 사람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사탄을 이용하시는지 여부가 궁금하기는 합니다만 거기에 붙들리면 우리는 신정론의 문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욥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을 의도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관점에서도 접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이나 시련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 불행이 하나님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시련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고통 혹은 시련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무의미성'은 모든 것을 불모로 만들고 맙니다. 아기를 낳는 여인들은 자기 몸을 뒤흔들고 있는 극심한 진통의 의미를 알기에 그 진통을 넉넉히 견딜 수 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의 '욥들'을 향해 그 고통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시련이 욥을 엄습합니다. 시련은 언제나 행복한 시간에 찾아옵니다. 욥은 잔치 자리에서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종들이 몰려와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가축들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또 다른 종들이 들어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 떼와 목동들을 살랐다고 말합니다. 설상가상입니다. 또 다른 종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갈대아 사람들이 나타나 낙타를 빼앗고 종들까지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징표였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기에 욥의 넋이 빠졌습니다. 그때 가장 큰 타격이 찾아옵니다.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져서 욥의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생떼같은 자식들의 죽음이 욥에게 가한 타격이 컸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행은 파괴적이기 때문에 사탄적입니다. 예측 불가능했기에 타격은 더욱 치명적입니다. 상황을 되돌리거나 통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애도의 표현입니다. 찢겨진 옷은 조각난 그의 마음입니다. 민 머리는 무방비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나는 이런 욥의 모습에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초연합니다. 거의 비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태도를 지향했던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통, 공포, 욕망, 쾌락과 같은 정념에서 해방된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이상적인 상태로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감정적, 정신적 동요가 없는 평정심인 '아타락시아'(ataraxia)를 이상적인 상태로 여겼습니다. 노예 출신의 철학자로 이름 높은 에픽테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의 글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우리는 잃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 자리로 돌아 갔다'고 말하라. 너의 자식이 죽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너의 배우자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너의 재산과 소유물을 빼앗겼는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허락했기 때문에 넌 현재 이러저러한 것들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네 곁에 있는 동안 소중히 여겨라,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여인숙의 방을 소중히 여기듯이."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장자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혜시가 조문차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두 다리를 뻗은 채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혜시는 혀를 차며 나무랐습니다. "자네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장자는 계속해서 물동이를 두드리며 대꾸했습니다. "아내는 태어나기 전에는 생명이 없었네. 아내는 바야흐로 천지 사이의 큰 방에서 편안히 자고 있다네." 나는 이런 큰 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같은 범인이야 이해하기 어려운 지경이지만 그래도 전혀 그 깊이를 짐작조차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런 큰 정신에 매혹 당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시던 예수의 모습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하튼 욥은 자기가 겪는 고통에 초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존재의 터전이 무너진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그는 그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느 사람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평정심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2) 욥기의 저자는 욥의 태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욥은 '까닭 없이'도 하나님을 믿고 경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탄의 패배는 자명해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일까요? 욥의 이 순전한 신앙이 문학적으로 보면 또 다른 불행의 전조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전도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7:16-17)


어중간於中間을 선택하라는 처세훈이 아니라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지나침은 경우에 따라서는 악이 되거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침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배제와 짝을 이룹니다. 물론 욥의 경건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불행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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