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욥기 산책 3

새벽지기1 2015. 10. 26. 20:48

 

제3강 생의 부조리 앞에서(2:1-13)


오늘은 욥기 제2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욥의 곤경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시련의 폭풍 속에서 애써 자기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시련 앞에서 발설된 욥의 말이 겸손하고 신실하다고 하여 그의 속까지 편안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다만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질서정연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고 나니 삶은 '부조리'(absurdity) 그 자체입니다. 부조리의 사전적 의미는 '도리에 어긋나거나 불합리한 일'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 한계상황'을 지칭하는 말로 쓰입니다. 부조리에 직면해 보신 적이 있나요? 갑자기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동안 추구해왔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삶으로부터 유배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익숙하던 세계가 돌연 낯설게 변합니다. 


1, 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부조리 문학이 등장했습니다. 예민한 문인들이 전쟁의 참상 앞에서 인간의 인간됨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카뮈나 카프카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되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1912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첫 문장부터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있음을 발견했다". 의식은 그레고리이지만 몸은 해충입니다.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동일성의 비동일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자기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도 그를 짐스럽게 여겨 냉대합니다. <소송>은 1925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주인공 요제프 K는 원인 모를 소송에 휘말려듭니다. 누가 소송을 제기했는지, 그리고 그 까닭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요제프 K의 죄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검사도 판사도 모릅니다. 카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스의 신화>도 삶의 부조리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또 떠오르는 인물이나 작품이 있나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군요. 1952년에 발간되어 초연되었다고 합니다. 작품의 주동인물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기약이 없기에 그 기다림의 시간은 권태에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 심심해서 나무에 목을 매볼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희망의 실현은 언제나 지연되지만 그 희망을 아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지요.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인 외젠 이오네스코의 작품도 부조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에 대한 생각을 좀 버려야 합니다. 인물들이 하는 말이 다 스쳐지나갈 뿐, 어떤 소통의 가능성도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 이야기로 너무 시간을 보냈나요? 욥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려다 보니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1절부터 3절 앞부분까지는 1장에서 나온 상황과 동일합니다. 천상에서 하나님의 주재로 회의가 열리고, 그 자리에 사탄도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시고, 사탄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물으시면서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화 문법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오마주hommage라고 할 수 있을까요? 3절 하반부터 내용이 조금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힐난조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이 사탄의 충동질에 넘어가신 것처럼 보여서 조금 난감하긴 한데, 하나님은 이 말로써 사탄과의 대화를 끝내고 싶으셨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탄은 집요합니다. 여간해서는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사탄은 어떤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4-5)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수사학은 현란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말은 베두인들의 속담입니다. 가죽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환품목이었습니다. 교환은 언제나 가치의 동등함을 전제합니다. 사탄이 속담까지 인용하는 까닭은 다음에 할 자기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물 전체를 버릴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소유물 뿐인가요? 자기가 지켜온 삶의 원칙이나 신앙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소유물과 생명은 등가 관계가 아니니 욥에 대한 시험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탄의 반론입니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이렇게 될 겁니다. 


     생명>모든 소유물


사탄은 욥의 본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의 '뼈와 살'을 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욥은 '틀림없이' 주님을 욕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을 하강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요함'이 '사탄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 않던가요? 사탄이 사용하고 있는 '틀림없이'라는 부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에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여백이 없는 확신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허황한 사람일수록 '절대로', '죽어도', '맹세코' 등의 강한 표현을 선포합니다. 진실한 이들은 굳이 이런 어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진실은 담담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새번역은 이 말의 뜻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탄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유혹자는 아닙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욥기의 사탄과 유사하지만, 그가 신 앞에서 사람을 참소하는 자라기보다는 헛된 것으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욥기에 나오는 사탄은 보상에 대한 약속으로 사람을 유혹하지는 않습니다. <파우스트>에서 하나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젊은 날, 나도 이 구절을 의지하여 나의 종작없는 방황을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사실 노력한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방황이 아니라 방황을 그치고 안주하는 것입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이런 약속을 합니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기꺼이 파멸의 길을 가겠다". 이 약속 속에 이미 비극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지속될 수 없다는 뜻이 이 속에 내포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사탄의 집요함에 하나님은 한 번 더 넘어가셨습니다. 좀 단호하게 맺을 건 맺고 끊을 건 끊어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물렁물렁해서 사탄에게 틈을 주신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사탄의 제2차 공격을 허락하십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2:6). 사탄의 공격은 신속하고 정밀합니다. 그가 욥을 치자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다고 합니다. 가려움과 고통이 묘하게 뒤섞여 그를 괴롭힙니다.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습니다. 고통은 한 사람이 딛고 서 있던 토대를 서서히 허물어뜨립니다. 고통에 사로잡히는 순간 세계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의미만 남습니다. 때때로 고통은 자책감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뭔가 자기 삶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지요. 욥은 재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참회의 몸짓입니다. 성경에서 참회하는 이들은 일쑤 옷을 찢고 티끌과 재를 뒤집어 쓰지요. 그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의 유한함을 절감할 뿐입니다. 유한함 자체가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죄책을 느끼기도 합니다. 고통 혹은 병은 이중적 소외를 가져옵니다. 자기로부터의 소외와 사회적 소외가 그것입니다.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욥이 누렸던 사회적 존경은 철회되었습니다. 그는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저주받은 자처럼 보입니다.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이 한센병을 가리켜 '천형天刑'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둥이가 아니라 성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꽃과 나비가/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목숨이 된 것이올시다.//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호적도 없이/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시인은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세상에 설 땅이 없습니다. 가히 식민지 시대의 욥이라 할만 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좀 짓궂습니다. 재산이 사라지는 것은 그렇다 쳐도 자식들이 참담하게 죽임을 당한 현실 앞에서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받은 것은 욥의 아내였을 겁니다. 태중에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그 생명을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바다라지요? 바다 해海 자에 어머니 모母 자가 들어있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만의 신학자인 송천성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co-creator of God)라 말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야기에서 자식을 잃은 한 여인의 슬픔은 반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식을 잃고 우는 라헬의 울음에는 민감한 유대인들이 이 여인의 슬픔을 외면했다는 사실이 좀 속상합니다. 오히려 이 여인은 불신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나는 이 여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 여인에게 설익은 비판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서슴없이 돌을 들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악마의 보조자'라고 했고, 칼빈은 '사탄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할 마음이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거스르는 말을 한다고 하여 그를 비난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영혼이 갈가리 찢겨 울부짓는 이에게 윤리 도덕의 잣대나 신앙적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 자체가 폭력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우는 이들과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칠십인역 성경에는 이런 대목이 추가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어느 선생님이 번역하신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욥의 병이 오래 계속되었다. 한번은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 겁니까? 당신은 구원해 주실 것을 바라며 좀 더 기다려 보자 하지만, 여보,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해산의 고통도, 애써서 기른 수고도 다 헛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보, 당신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속에서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기 하 세월입니까? 그 동안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 놓고도,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 위해, 빨리 해지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을 향해 무어라고 항의나 하고서, 죽어버리십시오.” 욥은 그러한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상력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 가운데서도 매우 귀중한 선물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제국들이 자웅을 겨루는 현장에서 모두가 인간다운 존엄을 누리며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꿨습니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멋진 꿈을 기억하시나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는" 세상은 꿈 아니고는 올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꿈은 허황되어 보이지만 그런 꿈조차 없다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난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무력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에서 하나님이 지배하는 섬김과 나눔과 돌봄의 세상을 상상했습니다. 사람이 피부색이나 인종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각자의 존엄을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꿈 또한 기존 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꿈이었을 겁니다. 


나는 성경이 '주름잡힌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가 전승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염원이 그 속에 온축되지 않았겠어요? 민담을 채록하는 이들은 전승자의 이름과 채록 장소 그리고 시기를 반드시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끈한 텍스트는 다양한 해석을 차단합니다. 오직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이지요. 동일성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들, 곧 이질적인 이들은 폭력적으로 배제되곤 합니다. 


욥의 아내의 입장에서 욥의 고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 장면에서만 등장하고 또 다시 욥기 전체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나는 욥의 아내의 말 속에 담긴 통곡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의 상상력에 맡겨두고 싶습니다. 


아내의 피묻은 언설에 대해 욥은 너무나 단호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10). 욥은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욥은 이번에도 믿음의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사탄의 패배는 자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욥의 믿음에 감동할 수가 없습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 제게는 낯설게 보입니다. 차라리 둘이 부둥켜 안고 울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일까요?


이제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대목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욥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한 소문은 아주 멀리까지 퍼져갔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지 않습니까? 먼 데 살고 있던 욥의 친구들에게도 그 소문이 당도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불원천리하고 욥을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그 동기를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만한 우정을 보셨습니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친구들은 그런 우정의 전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먼 길을 떠났습니다. 길에서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비용도 적지 않게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산을 넘어서는 우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그들이 살던 지역과 더불어 언급됩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그 지역이 정확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지역은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것입니다. 먼 여정 끝에 그들은 마침내 욥 앞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왕처럼 고귀했던 그의 모습은 참혹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충격으로 말을 잊었습니다. 욥기는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2:12-13)


슬픔을 못 이겨 소리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머리 위에 뿌리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땅바닥에 내려앉은 욥의 곁을 밤낮 칠 일 동안이나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만한 우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 또한 불행을 겪는 친구에게 이런 우정을 보여 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벗의 곁을 지킬 수 있지만 만사 제쳐두고 이레를 그와 함께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말 없음'입니다. 고통 앞에서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도구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이 끊긴 자리에서 친구들의 우정은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탁월함은 이 대목에 있습니다. 욥의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는 친구들, 더구나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의 존재는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철저히 뒤집히고 맙니다. 이 대목은 욥기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친구들을 욥의 적대자로 돌변시켰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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