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욥기 산책 4

새벽지기1 2015. 10. 26. 20:49

 

죽음을 그리워하다(3:1-26)


욥기의 독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욥을 보며 이중적 감정을 느낍니다. 하나는 '아, 믿음의 사람은 역시 범인들과 다르구나!' 하는 경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흔들림조차 없다는 게 말이 돼?' 하는 일종의 저항감입니다. 여하튼 2장까지의 욥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3장에 이르면 어조가 달라집니다. 물론 문학적 형식도 달라집니다. 먼저도 이야기 했었지요? 2장까지가 산문체 문장이라면 3장부터는 운문체 문장이라고요. 산문은 내러티브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운문은 글의 속도감, 리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압축과 생략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시는 읽기 어렵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시가 어렵다는 편견은 대개 중고등학교에서 받은 시 교육의 폐해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시와 친해지고, 은유적 언어에 맛들이기도 전에 우리는 '밑줄 좍!' 긋고 그 단어 혹은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받아 적어야 했으니 시와 친해질래야 친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시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외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입으로 중얼중얼 외우는 동안 언어의 리듬을 익히게 되면 각각의 단어들이 괜히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시인들은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도 허투루 찍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아, 역시 시는 어렵구나' 하는 편견을 강화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자, 이제 다시 길을 떠나볼까요. 욥기 3장은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1)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다짜고짜'라는 단어는 이런 데 쓰는 것일 겁니다. 자기에게 닥쳐온 운명을 고요하게 수용하던 그가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 후'라는 단어가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했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욥의 내면에서 벌어진 이런 변화는 너무 단절적이어서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고난 앞에서도 의연했던 욥의 모습을 신앙의 모범으로 추켜세우던 이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이게 사람이지요. 욥은 초인(超人)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었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이었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에 직면할 때 사람은 일쑤 자기 자신을 부정합니다. 깜짝 놀랄 때 두 눈을 가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요. 욥이 자기의 상처입은 영혼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해주는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재산이 스러진 것은 그렇다 쳐도, 생때같은 자식들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가깝던 이들조차 낯선 이로 변하고, 연민에 찼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경멸로 바뀌어 가고, 삶의 전망조차 불투명할 때 자기 생을 무겁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의 피울음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의 피울음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더라면"(영어로는 기원과 소망을 나타내는 조동사 may 혹은 조건 가정 양보를 뜻하는 let으로 번역됨)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9절까지 계속됩니다. 거의 똑같은 구조입니다. 한번 찾아서 소리내 읽어보세요.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3:3-9)


지면 관계상 행갈이를 하지 않은 것이 좀 유감이긴 하지만, 그래도 쉼표가 있어 리듬을 타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요? 어떻습니까? 눈으로 볼 때와 낭독할 때가 분명히 다르지요? 마치 각혈을 하듯 왈칵왈칵 쏟아지는 문장이 우리를 욥의 고통 속으로 깊이 끌어들이지 않던가요? 이처럼 "~더라면/~했더라면"이라는 어구의 반복을 통해 저자는 시에 리듬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시적 의미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어구들은 9절 말미에 나오는 "좋았을 것을"이라는 구절에 걸립니다.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이의 탄식이고 절규입니다. 삶이 순탄할 때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삶이 힘겨울 때 나의 있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됩니다. 그럴 때면 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삶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그런 자신감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자기 앞에는 아스라한 무의미의 심연만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탄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10). 새번역은 조금 더 실감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부질없는 한탄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터져나오는 한탄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11절부터 17절을 이끄는 단어는 '어찌하여'입니다. '어찌하여'는 '언제까지나'라는 단어와 더불어 탄식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인식의 장벽과 삶의 장벽에 부딪힌 이들 속에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단어들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3:11-12)


루마니아 태생의 철학자인 에밀 시오랑의 글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여주는 도저한 허무주의에 깊이 이끌렸던 적이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두 말할 필요없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불행히도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문장은 독약과 같아서 예민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삶의 과정을 태어남이라는 불행을 잊기 위해 안간힘으로 이해하는 그의 허무주의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젊은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가 "탄환은 재어놓았습니다. 지금 열두시를 치고 있습니다. 자, 그럼 됐습니다. 로테! 로테! 안녕, 안녕!"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 또한 베르테르가 되어 가슴이 무지근해지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삶은 참 힘겹습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해산할 때 죽어서 나왔더라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고통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욥의 절규가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와 비슷한 심정에 사로잡힌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지옥은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없는 곳이라 하더군요. 오직 고통만이 그의 벗이 될 때 누구라도 욥처럼 탄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이쯤 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가 터져나올 법도 한데 욥은 일체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의식 속에서 부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일까요? 저는 욥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신의 일식'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이것은 <나와 너>로 널리 알려진 마틴 부버의 책 제목입니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어 신의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가리켜 '신의 일식(日蝕)'이라 표현했습니다. 신은 계시지만 너무 멀리 계신 것이지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조차 내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때 말입니다. 


신문에서 미국 신경학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9년 전 안구 흑색종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았습니다. 거의 완치되었다 생각했는데 그만 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직감적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그는 죽음을 앞둔 심경을 밝혔습니다. "나는 살아 있음을 강렬하게 느낀다. 그 시간에 우정을 깊게 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하고, 더 많이 쓰고, 힘이 닿는다면 여행도 하고, 이해와 통찰력을 한 단계 높이게 되기를 희망한다."(한겨레신문, 2015년 2월 23일자에서 재인용) 그는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 담담한 그의 고백이 깊은 감명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경우와 욥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욥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다가올 죽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주고 있던 가치관과 삶의 존엄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죽음을 소망합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등장하는 쿠마의 무녀는 '네 소원이 뭐니?' 하고 묻는 이들에게 '죽고 싶어'라고 대답합니다. 생의 권태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는 쿠마의 무녀와 같지 않습니다. 권태가 아니라 무의미가 그를 흔들고 있습니다. 욥에게 죽은 자들의 세계는 매혹적입니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3:17-19)


그에게 있어서 죽음의 세계는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는 곳입니다. '죽은 자들이 있는 곳' 하면 사람들은 즉각 지옥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벌'과 깊이 연관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옮겨감' 혹은 '열조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는 슬피 울며 말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창37:35).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산 자의 땅으로 끌어올리려고 명부로 내려갑니다. 그는 하프 연주로 명부의 신인 하데스를 감동시켜 아내를 데려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죽은 자를 산 자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일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는 오뒷세우스가 여신 키르케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하데스로 가서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은 자들의 땅인 그곳은 곰팡내가 나는 음습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그곳을 그리워합니다. 이꼴 저꼴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자들이 설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고, 갑질(?)하는 사람들의 새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됩니다.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나는 이것이 '욥'이라는 개인의 탄식이 아니라 욥기가 저술될 당시의 도탄에 빠져 있던 민중들의 염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세계로 옮겨놓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의 소란이 그치는 세계는 공의가 살아있는 세상입니다. 피곤한 사람들이 쉼을 얻는 세상은 자비가 사회화된 세상입니다. 감독자의 호통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입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는 세상은 차별이 없는 세상입니다.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는 세상은 모든 이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입니다. 


죽음을 가리켜 '위대한 평형 장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욥은 모든 차이가 무화되는 죽음의 세계를 갈망합니다. 정직한 절망입니다. 그는 초월이나 달관의 세계로 도피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소동파의 이런 시구를 좋아합니다. "지금은 슬픈 맛 다 알기에/말하려다 그만두고/말하려다 그만두고/그저 시원하니 좋은 가을이라 말하지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고 말함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여백을 창조하는 솜씨가 가히 시선(詩仙)답습니다. 또 같은 시인의 이런 시도 있습니다. "인생 머무는 곳,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눈밭을 밟는 것과 같을지니/눈밭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지만/기러기 날아가면 어디로 갔는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욥의 상황은 이런 호젓한 한가로움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찢긴 사람입니다. 그는 그래도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마주 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끔 중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탄식을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매일 밤 고통에 몸부림칠 때면 까무룩 잠이 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고들 말합니다. 긴긴 밤을 지새우는 것도 힘겹지만 아침을 맞는 것 또한 힘겹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 가운데는 죽음을 희망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탁(汚濁)에 물든 마음을 씻을 길 없어 몸부림치는 이들이나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의 기억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써놓은 글씨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듯이 자기 삶을 그렇게 지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현대판 '욥'입니다.


그런데 좀 씁쓸하지 않나요? 죽음의 세계에 당도해야만 이런 공평함을 누릴 수 있다면 삶이 너무 비극적입니다. 죽음의 세계가 보장하는 공평한 세상을 오늘의 세계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가 아닐까요? 알베르 카뮈는 세상과 삶 자체를 부조리로 인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살을 찬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예정된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해도 인간은 그 운명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처절하지만 그게 삶입니다.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이후에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비근한 일상의 자리에 돌입해오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은 시린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서서 누군가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욥은 자살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자살은 생명을 내신 분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는 다만 아파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3:20-22)


욥의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길 잃은 사람을 붙잡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실 뿐입니다. 지금 욥에게 하나님은 출구가 아니라 막힌 담입니다. 하지만 그 담은 비정하고 차가운 무정물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기대어 쉴 수 있는 품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쇠렌 키에르케고르)이라지만 욥의 절망은 빛깔이 좀 다릅니다. '어찌하여'라는 부사 속에 희망이 조금 묻어 있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 곤혹스러운 상황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지요. 전도서의 화자인 코헬렛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다 안다 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일수록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름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이 참 겸손입니다. 


욥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며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고통을 치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속마음을 숨긴 채 경건을 가장할 마음도 없습니다. 고통은 그로 하여금 오직 자기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3:26). 그는 뿌리 뽑힌 사람입니다. 마치 가죽이 벗겨진 것 같아서 슬쩍 옷깃만 스쳐도 생생한 아픔에 소스라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채플에 그린 <천국과 지옥>에서 바돌로매 성인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는 살갗이 벗겨진 채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바돌로매는 벗겨진 자기 가죽을 들고 있습니다. 아프고 괴롭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켈란젤로가 바돌로매의 자리에 자기 얼굴을 그려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괴로움이 있었길래 그는 그렇게 처절하게 자기 응시를 한 것일까요? 저는 바돌로매의 벗겨진 가죽,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얼굴에서 욥의 모습을 봅니다.


욥은 이제 자기 삶의 입각점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것 같습니다. 지금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말없이 곁을 지켜줄 사람입니다.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주고,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주는 벗들 말입니다. 우정이란 비를 맞고 있는 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내던지고 그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지요? 이건 사실 제 말이 아닙니다. 게오르규의 <25시>에 나오는 한 장면을 제멋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 욥에게는 친구의 불행 앞에서 칠 일 밤낮을 함께 울어준 벗들이 있었지요? 지난 시간에 나는 '그만한 우정이 또 있겠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 나시지요? 그런데 그들은 정말 우산을 내던지고 욥과 함께 비를 맞았나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산을 접어 욥을 두둘겨 팹니다. 가죽이 벗겨진 그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려댑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다음 시간부터 우리는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치열한 논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제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현대판 욥들을 위해 함께 기도를 올리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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