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욥기 산책 6

새벽지기1 2015. 10. 26. 20:52

 

제6강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6-7장)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는 친구들 가운데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욥을 닦달하는 대목을 살펴보았습니다. 말투는 비교적 점잖은 듯했지만 그 속에는 듣는 이의 가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눈싸움을 해본 적이 있으시지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약이 바짝 오르면 눈 속에 연탄재를 슬쩍 섞기도 했습니다. 안에다 돌을 넣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꼭 이런 경우 같습니다. 신랄한 말도 아프지만 점잖은 체 하는 말이 더 아플 때도 있는 법입니다.


외로움 속에서(6:1-13)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했던 욥에게 외로움의 무게까지 얹혀졌습니다. 마주잡을 손인 줄 알았던 벗들의 손이 그를 밀쳐내고 있습니다. 그는 성좌에서 떨어져 나온 별처럼 어둠의 공간을 홀로 유영해야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J. Tillich, 1886-1915)는 '쓸쓸함'(lonliness)과 '외로움'(solitude)를 구별해서 설명합니다. 쓸쓸함이 홀로 있음의 괴로움이라면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단어의 번역어가 적절한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또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거절될 때면 쓸쓸함이 엄습합니다. 그 쓸쓸함은 창조적인 힘으로 승화될 때도 있지만, 내적 통합성을 깨뜨리는 힘으로 작동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존재론적인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달아나곤 합니다. 파스칼은 "우리의 불행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방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보들레르는 법석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미치광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심한가요? 하지만 성숙한 삶은 쓸쓸함을 외로움으로 전환시킬 때 시작됩니다. 예수는 동녘 하늘이 희부윰하게 밝아 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한적한 곳을 찾아가 엎드렸습니다. 그 외로운 시간은 우리의 존재를 영원한 중심에 비끌어매는 시간이 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오히려 욥의 쓸쓸함을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함께 있기에 마음이 푼푼하기는 커녕 아픔만 더욱 도드라집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틸리히가 말한 바 쓸쓸함을 외로움으로 전환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마음에 들끓고 있는 감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6:1-3)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물론 괴로움은 주관적 감정이기에 보편적 척도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우리가 욥의 처지가 되어본다면 같은 말을 하게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는 구절은 자기의 정제되지 않은 말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말의 부질없음을 경험한 자의 탄식입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전능자의 화살-->독-->두려움으로 이어지는 이 숨가쁜 진행을 보십시오. 전능자의 화살이라는 말을 굳이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것 같은 쓸쓸함을 그런 말로 드러낸 것일 겁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쓸쓸함은 자기 파괴적입니다.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6:5-7)


극단적인 괴로움으로 인해 살맛을 잃어버렸다는 말일 겁니다. 욥기의 저자는 고통을 오감 중에서 맛의 상실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겠느냐"라는 말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면서 전능자의 화살을 맞아 영혼에 독이 퍼진 자의 절망이 도드라지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고, 친밀함이 소원함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과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감각의 '어둔 밤'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은 영혼의 정화를 위한 일종의 길잡이 입니다. 하지만 지금 욥은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6:8-10)


참 슬픈 소원이지요? 차라리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하고 생명을 거두어가신다면 그것을 위로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를 잘 아시지요? 테겔 형무소에 갇혀 지낼 때 그는 살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번민했다고 합니다. 그는 신체 고문을 견뎌 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동지들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유혹을 극복한 후 "온갖 문제를 지난 한계 상황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나의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다 쇠약해진 욥은 여전히 죽음에의 이끌림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한 가지 자부심이 남아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지만, 기신도 못할 만큼 쇠약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부정하고 싶은 것은 슬프기 이를 데 없는 자기의 존재이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한계를 너무도 또렷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6:11-13)


기다림에도 힘이 필요한 법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이 비록 막연하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온다며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립니다. 언젠가 오겠지 하면서요. 그들은 권태를 이기기 위해 실없는 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기다림의 대상이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조리한 것이지요. 하지만 기다림이 큰 설렘일 때도 있습니다. 황지우는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아름답지요? 시인의 가슴은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에 쿵쿵거림으로 반응합니다. 설렘과 기대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순간순간이 마치 은총처럼 환합니다. 하지만 욥은 지금 죽음을 기다립니다. 기력도 인내도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한 절망을 두 가지 말로 드러냅니다.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다',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났다'.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현실 경험을 자기 삶으로 통합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기력할 뿐입니다.


아, 무정한 친구들(6:14-30)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그 곤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욥의 절망감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의 신학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저 다가서서 손을 붙들어주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그의 고통을 도드라지게 할 뿐입니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6:14-15)


새번역으로 읽어볼까요?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 공감(empathy)의 능력이야말로 인간됨의 척도가 아니던가요? 역지사지하는 마음 말입니다. 욥은 '친구는 어떤 경우에도 친구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상황이 변했다고 하여 입장과 태도를 바꾼다면 그게 무슨 우정이냐는 것입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입니다. 볕 좋은 날에는 가까이 지내고, 흐린 날에는 멀어지는 것이지요. 16절부터 18절까지는 바로 그런 상황을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광야 길을 걷다가 마른 목을 축이려고 기억에 의지하여 그 개울을 찾아온 '데마의 대상'이나 '스바의 행인'(19절)들의 실망 혹은 절망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위험한 적들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마치 욥을 '더러운 오물' 보듯 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를 비난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옮겨올지도 모를 재난을 피하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그들은 그저 말꼬리를 붙잡고 비난할 뿐 욥의 죄가 무엇인지 특정하지 못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덧없는 것입니다.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는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절망한 자가 쏟아내는 말 그 자체에 집중하면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속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6:26). 옳습니다. 바른 말은 가르고 정죄하는 말이 아니라, 감싸주고 일으켜 세우는 말입니다. 


옛 세계는 사라지고(7:1-21)

7장의 첫 대목은 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던져진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달픔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면서 그들이 겪어야 할 고단한 삶을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하와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나는 흙을 일구며 땀을 흘려야 하는 노고 말입니다. 욥도 같은 말을 하네요.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7:1-2)


평범하게 읽힐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이 대목이 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욥은 지금 저녁 그늘을 바라는 종의 마음과 삯을 기다리는 품꾼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경건할 뿐 아니라 인정이 많은 사람이니 그가 고난의 폭풍 속에 내던져지기 전에도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의 언어가 이렇게도 곡진한 것은 그가 몸으로 겪어냈던 고통의 현실 덕분이 아닐까요? 오래 전 농촌 지역에서 목회하던 어느 목사님이 주보에 실었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책 제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은 머슴도 안 살아 보신겨>. 연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종이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한 말이랍니다. 세찬 비라도 좀 내려주시면 잠시 쉴 수 있을 텐데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한 것이지요. 고통이 없었더라면 '땅의 사람들'의 자리에서 사고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해방신학을 통해 배운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입니다. 한 사회의 본질을 가장 깊이 통찰하고 있는 이들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땅바닥을 기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근로기준법을 불태우며 분신했던 전태일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외국에서 수입한 이론을 소개하는 데 급급했던 사회학자들과 신학자들 가운데서 아래로부터 사고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욥에게도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혜자로 살아오던 욥이 누군가의 위로를 구하는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쓸쓸함과 육체적 고통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습니다. 욥의 밤은 길기만 합니다.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시간을 묵새겨 본 적이 있으신가요?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7:4-6)


욥은 자기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다는 사실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감합니다. 행복도 아스라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음산한 스올이 그를 확고히 움켜쥐려 합니다. 욥은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좀 털어놓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12). 여기서 욥이 말하는 바다 혹은 바다 괴물은 셈족들이 생각하는 혼돈의 원형적 이미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를 하나님의 창조물을 위협하는 혼돈의 잔존물로 이해했습니다. 성경은 혼돈이 하나님에 의해 극복되고 제어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 경험은 그것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욥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혼돈의 '바다'처럼 여기시며 적대시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는 구절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섬세한 보호하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옴짝달싹 못하도록 감시하시는 것 같다는 괴로움의 표현입니다. 혹시 그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까 하여 잠을 청하여 보지만 악몽과 환상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7:15-16)


몸과 마음이 다 무너졌습니다. 몸의 괴로움도 물론 크지만, 삶의 무의미는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떠밀리고 그는 구차스러운 육신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p.96).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책의 작중인물인 라몽은 불행에 빠진 다르델로에게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p.147)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무의미를 받아들이고 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 생의 무의미를 극복하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욥은 아직 진지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생이 그만큼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그의 저항입니다. 고난 속에서 성숙해져야 한다는 엘리바스의 충고는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작동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욥의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리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7:17-21)


이 대목은 '뒤집힌 시편 8편'이라 할만합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와 사랑과 돌보심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하게 만드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걸작품인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온 우주 가운데 먼지와 같은 존재인 인간에게 왜 하나님이 그렇게도 깊은 관심을 두시냐고 묻고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더할 수 없는 부담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겪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는 무서운 분,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날리는 분입니다. 지난 날 다정하고 인자했던 그 하나님이 마치 그를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처럼 안색을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읍소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7:21).


읍소라 했지만 사실은 책망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다면 사하시고, 죄악이 있다면 제거하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욥의 하나님 이해는 정당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탄식하시지 않았습니까? 탄식 혹은 책망하는 듯한 말투 속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욥에게 희망의 문이 과연 열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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