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욥기 산책 5

새벽지기1 2015. 10. 26. 20:50

제5강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더냐(4-5장)


복된 날입니다. 하루하루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이 신비합니다. 느닷없이 죽음의 문턱에 서 본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은총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에게 함부로 충고의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정이라고?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등의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커 J. 파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교육지도자이면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데, 저는 그를 매우 빼어난 작가로 여깁니다. 그는 어느 책에서 자기의 우울증에 대해 고백한 바 있습니다. "유전적인 원인이나 뇌의 불균형한 화학 작용에서 비롯된 우울증은 약물로 치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우울증들은 참자아가 깊숙이 매장되어 길고 어두운 밤을 살아야 하는 데서 비롯된다."(파커 J. 파머,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윤규상 옮김, 해토, p.55) 그는 우울증을 다른 길을 찾으라는 영혼의 외침이라고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우울증을 '푸른 악마'(blue devil)라고 한다더군요. 사람에게서 온기와 화색을 빼앗아가기 때문일까요? 그는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격려나 충고의 말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환멸만 키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거절하자 더 큰 단절감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친구 빌은 달랐습니다. 그는 매일 오후에 파커의 집에 들러 그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자신은 무릎을 꿇은 채 친구의 신발과 양말을 벗긴 후 30분 동안 정성을 다해 마사지를 해주었습니다. 아직 감각이 살아있는 신체 중 한 부분을 어루만짐으로써 빌은 파커가 세상과 다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홍윤주 옮김, 한문화, p.116-7)


한 동안 곁에 있어줌을 통해 욥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친구들의 태도는 3장에서 터져나온 욥의 탄식으로 인해 변하고 맙니다. 먼저 엘리바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벗들 가운데 나이도 제일 많고 터져나오는 격정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자기 수양도 잘 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건자입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삶의 태도까지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아마 윤리 시간에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 배우셨을 겁니다. '스토아 학파' 하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게 있지요? '주전 4세기 말 제논에 의해 창시, 주후 1-2세기에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발전 계승됨'. 또 아는 게 뭐가 있지요? 아, 스토아라는 학파의 이름은 이 학파가 주로 그리스의 공공 건축물에 있던, 벽과 기둥으로 구성된 주랑(柱廊, 스토아)을 거닐며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도 있네요. 그 정도면 훌륭합니다. 스토아 학파가 추구한 덕의 최고 형태는 무엇이었지요? 맞습니다. 아파테이아(apatheia) 즉 마음의 평정입니다. 사람들은 에픽테투스의 일화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는데 화가 난 주인이 그의 팔을 꺾자 아주 평온한 어조로 '그러다가는 팔이 부러질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지요. 그 평온함 때문에 더 열 받은 주인이 팔을 더 꺾어 그만 에픽테투스의 팔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가 그랬대요. '그것 보세요. 제가 부러진다고 했잖아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리스 철학 사조 가운데는 우리 말로 쾌락주의라고 번역되던 에피쿠로스 학파도 있습니다. 쾌락주의라는 번역어는 오해의 여지가 참 많습니다. 자칫하면 19금 철학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이 말하는 쾌락이란 감각적 즐거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은 덕은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두려움이나 고통이 없는 부동심(不動心)입니다.스토아 철학이 '주랑의 철학'이라면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은 '정원의 철학'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의무를 수행한다든지 공적 현실에 뛰어들기보다는 은둔하여 유유자적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괜히 세상 일에 연루되어서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복잡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공공의 의무를 외면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입니다. 


죄 없이 망한 자도 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엘리바스의 태도는 스토아 철학자를 연상시킵니다. 4장 2절부터 5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4:2-5)


누가 말을 걸면 짜증스러우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더 이상 침묵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을 당하기 이전의 욥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전에는 많은 사람을 잘도 가르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격려하고 붙들어주기도 하더니, 정작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보기에 마음의 평정이 무너진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길을 잃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못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조금 성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욥의 고통에 공감했더라면 말을 조금 더 아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한 말씀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관찰보다는 애정이,/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입장의 동일함,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마음이 곧 공감의 뿌리입니다. 여하튼 엘리바스의 점잖은 나무람은 아쉽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4:7-9)


엘리바스는 인과응보 신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보(業報, karma)라고 하지요.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다 우리가 전생에 뿌린 씨가 발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업보의 신학'을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전통주의자입니다. 세상에 자신은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는 자기를 속이고 있거나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라는 말은 그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듭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엘리바스는 일반론을 말하는 듯 보여도 그의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욥입니다. 엘리바스에게 욥은 파렴치한 사람입니다. 멸망이 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는 정말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나요? 여기서 원죄 교리를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현실을 둘러보자는 말입니다. 자연 재앙으로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쟁과 테러로 인해 죽어간 이들 가운데 무고한 이들은 없습니까? 성폭력의 대상이 된 이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참담한 일을 겪어야 했단 말입니까?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가 그대로 거둔다는 말은 현실에 꼭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원망사고(願望思考 wishful thinking)라 말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반화에는 오류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논리학은 이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인식을 위해서는 범주화 혹은 일반화가 불가피하지만, 그것을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맹신이거나 무지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옳은 듯 하지만 문제가 많습니다. 


신비 체험

그는 자기의 생각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기의 신비 체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자신의 작음과 부정함을 인식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 앞에서 번민하다가, 결국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아버지로서의 윤리적 의무를 돌파하여 하나님의 앞에 홀로 섰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경험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 신비체험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어떤 영이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느꼈을 때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고 온 몸의 털이 주뼛하였다(4:14-15)고 고백합니다. 그 때 조용한 가운데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4:17-19)


대꾸할 말이 없이 정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위축될 필요 없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지 마십시오.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고 사람이 그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대목이 좀 걸립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않으시고, 그의 천사들에게마저 미련하다 혹은 허물이 있다 하신다는 말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난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 믿어서 탈인 분 아닌가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당신을 배신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분입니다. 물론 자유를 주신 뜻은 배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지고 당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이나 숭배는 무가치한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까지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숨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 혹은 신뢰를 경험했기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5) 하고 고백했습니다. 엘리바스가 믿는 하나님과 좀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엘리바스의 하나님은 마치 오쟁이진 남편 혹은 의부증에 시달리는 아내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소위 엘리바스의 신비 체험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거나, 어떤 광경을 보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이들은 그런 경험을 한 이들 앞에서 괜히 위축됩니다. 자기가 믿음 없는 사람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의 분별은 물론 영으로 해야 하지만, 바른 지식 또한 중요합니다. 엘리바스는 자기의 신비 체험을 욥을 비판하는 전거로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비 체험은 성서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그것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동기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싶어합니다. 겸손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분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습니다.


'나라면'이라는 말의 무서움

일단 말의 순환논리에 빠지면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법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5:1-2). 이게 무슨 소리이지요? 한 마디로 욥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욥은 졸지에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욥이라는 구체적 존재는 사라지고 욥으로 표상되는 추상성만 남게 되었습니다. 혈과 육을 가진 욥,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욥이 소거되고 남은 자리에 싸늘한 이론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이론이라 말하지만 이것은 사실은 자기의 감성에 바탕을 둔 편견인 '억견(臆見)'(doxa)일 뿐입니다. 지금 에리바스에게 결여된 것은 참된 인식인 '에피스테메'(episteme)입니다. 엘리바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욥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 혹은 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정은 이렇게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이의 뿌리가 순식간에 뽑히고, 그의 집이 순식간에 망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자식들은 거렁뱅이에다가 외돌톨이가 되어서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을 거라고 내처 말하고는 자기의 탁견에 방점을 찍듯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5:6-7)


재난과 고생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라는 말은 '인생은 고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살다 보면 이 말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재난과 고생은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엘리바스의 말은 그런 일반론의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일반론이 아닙니다. 저 구절 앞에 '욥의'라는 말을 첨가해 보십시오. 그래야 엘리바스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욥은 이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심적, 육적 고통에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혀졌습니다. 낙인 효과(烙印 效果, stigma effect, labeling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일단 어떤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 찍으면 상황이 변해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낙인 찍기는 일종의 인격 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낙인을 찍는 이들의 심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 욥에게 충고합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5:8)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5:17)


'나라면'이라는 단어가 참 묘합니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지요? 그런데 이 말 속에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무시 혹은 구분짓기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엘리바스의 말은 단정적입니다. 욥이 처해 있는 상황이 '전능자의 징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여 바로 잡아 주시니 얼마나 큰 복이냐는 것입니다. 참 은혜스러운 말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도 그렇게 들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욥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앞에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었을 테니까요. 


나머저 없는 저쪽 산마루

그러나 그런 욥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바스의 연설은 계속됩니다. 그의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땅에 비를 내리시고,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고, 낮은 사람은 높이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주시고,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는 분이고, 가난한 이들을 강자들의 폭력에서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밑줄을 그어놓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암송하기까지 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5:18-21)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눈시울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수십 번 '아멘'을 외칠지도 모르겠네요. 엘리바스의 말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마음에 내리는 단비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이 말씀과 만나는 순간 큰 위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혀의 채찍'이라는 말에서 딱 걸립니다.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지당한 말씀은 오히려 상처에 뿌리는 소금일 수도 있습니다. 채찍에 맞은 상처는 세월이 가면 아물게 마련이지만 혀로 맞은 상처는 영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욥은 지금 재앙 가운데 있습니다. 기근이나 전쟁 못지 않은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엘리바스는 이처럼 인과응보의 신학이 무너진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욥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그런 복을 누릴 것이라며 인과응보 신학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둘의 말이 어긋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욥은 자기의 무고함을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겪고 있는 그런 시련을 겪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평소에는 축복처럼 들리던 말이 어떤 때는 비수처럼 살을 파고들기도 하니 말입니다. 때로는 언어가 소통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욥의 외로움을 생각하는데 문득 엄혹했던 시절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박정만 시인의 시 하나가 떠오릅니다. "해 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들판에 꽃잎은 시들고./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 행의 끝에 꾹꾹 박아놓은 마침표가 마치 절벽 앞에 선 그의 마음인듯 싶어 마음이 무지근해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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