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3073

안식일과 사람 (2)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안식일과 사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신앙의 중심축입니까?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당연히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게 바로 성서읽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이며,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유지해야 할 긴장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말씀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불평이었습니다. 안식일 법을 빌미로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이런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안식일과 사람만을 대립적으로 판단..

안식일과 사람 (1)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오늘 본문은 보기에 따라서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니요. 그리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니요.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와 인간관계를 완전히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절대규범인 안식일을 상대화하는 이런 진술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진리의 성격은 이렇게 이중적입니다. 본질을 드러내면서 위기를 불어온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안식일은 무의미한 종교..

진설병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6)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1-6절의 다윗 이야기를 인용했습니다.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먹을 걸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마침 일반적인 빵은 없고 제단에 올린 떡, 즉 진설병만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거라도 달라는 다윗에게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을 다윗에게 내준 이유는 그 당시 다윗의 처지가 아주 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부마이자 군사령관이었던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하루끼니조차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사무엘상에는 제사장의 이름이 아히멜렉인데, 여기 마가복음에는 아..

읽지 못하였느냐?(막 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5) 예수님께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읽지 못하였느냐?” 하고 물으신 걸 보면 당신 자신은 글을 읽을 줄 아셨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고 물었을 때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는 요한복음의 진술도 이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소위 ‘예수 세미나’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글을 깨우친 사람은 2,3%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최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만 글자를 읽고 쓸 줄 알았다는 말인데,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안식일 (5)(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구약성서의 안식일은 안식년과 희년 사상의 단초입니다. 이들 개념은 모두 인간의 해방, 자유,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생태적인 평화까지 아우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이런 개념을 발전시킨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 삶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삶을 하나님이 창조한 원래의 뜻에 따라 새롭게 구성해내자는 게 바로 이런 개념들의 방향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런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정신이 교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는 이런 개념들을 순전히 개인의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받아..

안식일 (4)(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안식일(토요일)을 지켰습니다. 훗날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제국의 문화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주일(일요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로마제국이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사실이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어쨌든지 예배모임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하는 것은 문화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탄절이 서방교회가 지키는 12월25일이든 러시아 정교회가 지키는 1월6일이든 크게 중요한 게 아니듯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사실은 과연 오늘 교회의 주일이 신자들에게 참된 쉼을 제..

안식일 (3)(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안식일의 기본 개념은 악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쉼’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쉴 줄을 모른다는 뜻이겠지요. 쉬지 못하는 이유는 실낙원 이후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기초적인 생존 조건들이 보장되었지만 실낙원에서는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생존의 문제는 인간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차원이니까 접어두어야 합니다. 대신 생존이 아니라 부의 축적을 위해서 인간을 악한 노동으로 몰아넣는 사회구조는 풀어나가야겠지요.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의 일환이 바로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오늘 소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

안식일 (2)(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우리는 어제 안식일의 역사적 뿌리가 창조사건과 출애굽사건이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창조, 생명, 해방, 자유 등이 여기서 중심 개념들입니다. 이러한 안식일 개념에 노동의 금지 조항이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인간 역사에서 노동이 몰고 온 삶의 파괴에 기인합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성서의 계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지주나 기업주들은 일하지 말라는 이 명령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노동이라는 건 사람을 부리는 것이며 또는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소작농이나 노예들의 노동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노..

안식일 (1)(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사소한 행동을 문제 삼아 이렇게 트집을 잡았습니다. 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가? 남의 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는 구약성서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동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법이 금지한 노동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노동행위인가 아닌가는 유권해석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어쨌든지 그것이 노동행위라고 한다면 제자들은 분명히 안식일 법을 범한 것입니다.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안식일 법에 근거한 바리새인들의 문제제기는 옳지만 안식일..

밀밭 사이로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막 2:23)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다는 오늘 본문의 묘사는 전원적인 모습을 담은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예수님을 중간에 두고 종렬을 지었을까요, 아니면 횡렬을 지었을까요? 뒤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포함하면 사람 숫자가 제법 되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무리의 모습이 넓게 펴진 형태를 취했을 것 같습니다. 밀밭 사이의 한 무리들이라! 멋지군요. 밀밭 사이로 지나갔다는 게 겉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상당히 고달픈 일입니다. 한곳에 정착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 가르치는 유랑 전도자로 활동한다는 건 일단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어려움을 만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