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 406

속도를 줄여야 사람이 보인다

속도를 줄여야 사람이 보인다며칠 전, 길을 걷는데횡단보도에 걸려 있던 한 현수막이눈길을 끌었습니다.'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짧고 간단한 안전 운전 광고 문구였지만,그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요즘 세상은 속도가곧 성공과 능력을 의미하는 시대입니다.더 빠르게, 더 앞서 나가는 것을 중요시하며그러다 보니 속도는 곧 경쟁력을상징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속도를 높이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중요한 것들을 놓치기 쉽습니다.횡단보도 앞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운전자처럼,빠름만을 추구하다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소중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때로는 누군가의 아픔도, 도움의 손길도알아채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도꽤 많이 있습니다.속도를 줄이는 일은 단순히 안전과 평안뿐 아니라,더 깊은 관계와 진정..

때로 신앙은 냉철한 감정의 절제를 요구한다.(삼하12:15-25) / 리민수 목사

때로 신앙은 냉철한 감정의 절제를 요구한다.(삼하12:15-25)  본문은 나단의 예고대로 다윗의 범죄에 대한 보응으로서 밧세바와 다윗간의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 대신 솔로몬을 주신 것에 대한 언급이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은 뒤에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곧 일상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냉정한 사람이어서 라기보다는 회개한 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때로 신앙은 냉철한 감정의 절제를 요구한다.

주님만이 답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새날을 주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찬양하오니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은혜가 충만한 복된 하루가 하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심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 안에 선한 일을 계획하시고 친히 이루어가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옵기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권사님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만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권사님의 믿음의 여정을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이어지는 그 순례길 가운데서도 함께하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광야 같은 삶이요 풍랑이는 바다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3) / 이금환 목사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베드로후서1:3)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낄 수 있고, 아는 만큼 누릴 수 있고, 심지어 아는 만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고,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고,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 삼으신 분이신 하나님을 앎으로 보배롭고 큰 약속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신성한 성품이 우리에게 새겨지고, 점점 더 신적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보편 논쟁, 4월2일(화) / 정용섭 목사

오늘 영남신학대학교 수업에서 보편 논쟁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13세기에 새롭게 부각되면서 이 논쟁이 불거졌다. 보편(universalia)과 이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대한 문제다. 보편은 말 그대로 모든 것들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 또는 근원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관계를 생각한 이유는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에는 각종의 사물들이 존재한다. 나무, 구름, 고양이, 민들레 등등... 그것들은 상황과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 달라지지 않는 어떤 원천이 보편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학자들은 보편이 실재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라틴어로 universalia in re이다. 따라서 ..

부활 단상(2), 4월1일(월) / 정용섭 목사

사람은 부활을 단순히 ‘다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적으로 시간은 회귀가 아니라 진행이다. 생명도 앞으로 나갈 뿐이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 현상은 불가역적이다. 꽃을 다시 씨앗으로 만들 수는 없다. 물론 꽃이 씨앗을 맺긴 하지만 그 씨앗은 꽃을 피운 그 씨앗은 아니다. 거의 비슷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다르다. 진화 현상을 보더라도 생명은 앞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뒤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흔리 창조 원리의 회복이라는 말들을 하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통일교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지난 30일 묵상에서 말했듯이 이런 점에서 부활은 다시 지난날의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부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은 지금의 모든 생명 경험을 포기해야만 한다. 부활..

부활 단상(1), 3월31일(일) / 정용섭 목사

오늘은 부활절이다. 성탄절의 날짜는 조금씩 차이가 나도 부활절은 전 세계 기독교가 같다. 성탄절의 역사적 근거는 부활절에 비해서 조금 약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탄절이 아니라 부활절 종교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렇지만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부활에 대해서 다 아는 게 아니다. 그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활신앙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사실은 부활신앙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모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교회생활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부활 이후 예수님은 지금까지 어디에 계시는 걸까?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대답은 웬만큼 신앙의 연조..

‘죽은 자 가운데서’, 3월30일(토) / 정용섭 목사

내일 설교할 내용 중의 한 대목이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구절에 대한 해명이다. 예수 부활을 언급하는 텍스트는 이 구절을 놓치지 않는다. 복음서에도 그런 표현들이 있고, 사도신경도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창조가 ‘무로부터’라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죽은 자 가운데서’는 예수 죽음의 확실성을 가리킨다. 예수의 죽음은 가사나 임사가 아니라 다시 생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태다. 다시 돌아오는 건 죽음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다시 건너올 수 없는 죽음의 다리를 건넌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 가운데서’는 예수의 부활이 단순히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생명이 과연 무엇인가? 그걸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그 경험이라는 게..

십자가 처형, 3월29일(금) / 정용섭 목사

오늘은 성(聖)금요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운명하신 날을 요일로 계산한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달리셨다. 오늘의 금요일이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는 안식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잔인한 형벌이었는지에 대해서 강조한다. 일리가 있다. 매질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다는 행위와 그 이후에 이르는 과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다. 거기서 예수님이 당했을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그런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건 본질로부터의 이탈이다. 복음서 기자들을 보라. 예수의 고통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고통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요즘 식으로 말해 ‘쿨’하게 그 사건을 보도한다...

우리는 어떻게 상식을 잃어버렸을까? / 신동식 목사

우리는 어떻게 상식을 잃어버렸을까? 국어사전은 상식을 정의하기를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지식과 판단력이 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상식이 없으면 한 사회나 공동체가 혼돈에 빠집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나온 한 인권위원의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몰상식하다고 느꼈습니다. 국회의원이 지나가면서 막지 말고 비켜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상황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나는 막은 것이 아니라 비키지 않은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막은 것과 비키지 않은 것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일국의 인권위원인데 이러한 말을 온 국민이 보는 데서 당당하게 할 수 있는지 정말 의아스러웠습니다. 상식에 맞는 대답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