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5 17

신앙의 ‘태도(attitude)’다.(삼하5:17-25) / 리민수 목사

신앙의 ‘태도(attitude)’다.(삼하5:17-25)   본문은 다윗이 두 번에 걸친 블레셋의 공격을 완전히 물리치는 장면이다. 이처럼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온 이유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즉 블레셋은 길보아 전투 이후(삼하31장)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막대한 조공을 징수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는 저들이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윗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앞서 전쟁에의 출전 여부와 그 결과를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신앙의 기본은 바로 ‘태도(attitude)’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3:3-4) / 이금환 목사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언3:3-4)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목에 매달고 살고, 마음 판에 새기고 사는 것이 그 비결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의 귀중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심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의 귀중히 여김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

예수의 얼굴, 1월21일(월) / 정용섭 목사

수년전 영국의 어떤 연구소에서 예수의 얼굴을 CG로 복원한 적이 있다. 2천 년 전 유대인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실망한 분들도 많았다. 기존의 명화로 알려진 유럽의 잘생긴 남자 모습과는 달라도 꽤나 달랐다. 그런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실제의 외모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 인격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실존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그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     그의 운명도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그의 역사적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올림 받은 운명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전자는 ..

주현절에 대해, 1월20일(주일) / 정용섭 목사

오늘은 주현절후 둘째 주일이다. 주현절(Epiphany)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한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을 기리는 절기이다. 또는 아기 예수의 정결의식이나 예수의 세례를 기리는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주되심에 있다. 즉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다.     이런 절기는 좀 막연해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의 주되심이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숨겨 있다. 아무도 예수의 공생애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교회 전통에서 그 사실이 고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이라는 바울의 진술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극적인 삶, 1월19일(토) / 정용섭 목사

적극적인 삶에 대립해 있는 소극적인 삶은 오늘날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경쟁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하기 알맞다. 교회에서도 그런 삶은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피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라. 적극적인 삶이나 소극적인 삶이나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단지 연봉에 차이가 날 것이다. 연봉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은 걸 소비한다. 소비가 지배하는 삶은 권태롭다. 그것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소극적인 삶은 패배주의나 자기도취가 아니다. 그 무엇보다 훨씬 적극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연봉보다는 삶 자체에 영혼의 무..

적극적인 삶, 1월18일(금) / 정용섭 목사

현대인들은 적극적인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강요받는다. 일상이 그런 가치에 포위당했다. 뭔가 역동적인 것 같지만 안식이 없다.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한국교회는 소위 ‘긍정의 힘’ 류에 세뇌당한지 오래다. 목사와 회중들은 믿음으로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린다. 그렇게 달려봤자 안식이 없다.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세상이 달릴 때 옆에서 제동을 걸어야 할 교회가 앞서서 달리는 형국이다.     현대 문명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발전되었다. 그걸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배아 복제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되었다. 인류는 끝없이 그 길을 적극적으로 갈 것이다. 스스로 신이 될 때까지.     신이 될..

세균 찾기, 1월17일(목) / 정용섭 목사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구 러시아)은 군비경쟁만이 아니라 우주선 경쟁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다퉜다. 냉전이 종식된 뒤로 지금은 미국이 앞선 형국이다. 우주 탐험을 전담하고 있는 미국의 나사(?)는 오래 전부터 지구 밖으로 무인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있다. 태양계 밖으로 운항 중인 우주선도 있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행성은 화성이다. 지구와 가장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라고 한다. 화성 탐사에 들어가는 돈과 기술은 천문학적이다. 그들은 화성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쓴다. 만약 내일이라도 화성에서 세균 한 마리를 찾게 된다면 모든 나라의 티브이와 신문이 그 소식으로 도배가 될 것이다. 지구에는 차고 넘치는 게 세균이다. 지구 표면은 세균 세상이라고..

물 한 모금, 1월16일(수) / 정용섭 목사

오늘도 오후에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구에 물이 있다니! 이것보다 놀라운 현상은 별로 없다. 내 몸도 태반이 물이다. 물이 물을 마시니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할 순간이 올 것이다. 지구에 물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든지, 내가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럴 것이다. 아직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이 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하기 직전 까지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와야 할 순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물 한 모금으로 생명의 절정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 한 해를 살았으면...

율법의 본뜻 (막 2:23-28) / 김영봉 목사

해설:얼마 후,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다. 배가 고팠던 제자들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손으로 훑었다(23절). 율법은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는 것을 금지하지만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허용했다(신 23:25).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데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유형의 탈곡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그들을 따라 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예수께 여쭌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4절)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대답하신다(25-26절).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할 때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성막 제단에 올려 놓았..

새 것이 왔다.(막 2:18-22) / 김영봉 목사

해설:유대인들은 금식을 가장 귀한 경건의 표시로 여겼다. 그들은 회개할 때, 애도할 때 혹은 위기의 때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18절). 사람들이 금식을 경건의 척도로 간주하다 보니, 금식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표시를 내곤 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할 경우에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6-18). 예수님과 제자들도 금식을 했으나 전혀 표시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늘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베푸시는 잔치는 결혼식 축하 잔치와 같고 자신은 신랑과 같다고 설명하신다(19절). 레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