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5 13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 이금환 목사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3:10) 교만이 귀를 막고, 교만이 눈을 가리고, 교만이 마음을 굳게 닫게 하고, 교만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게 만들고, 교만이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게 만듭니다. 이런 교만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고, 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며,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의 판단력 부족을 깨닫게 하시며, 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가 얼마나 지혜가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한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지혜의 말씀, 지혜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며, 말씀의 권면..

자기 우상화와 폭력 (눅 15:25~32) / 김재홍 목사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

사람들의 빛(요 1:4), 요한복음 묵상(7) / 정용섭 목사

요한복음 기자는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여기서 빛은 물리적인 빛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메타포(은유)다. 빛은 세계를 밝혀서 사물을 인식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요한복음의 이런 진술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과 일치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다. 문제는 이런 사실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자신들의 삶과 실질적으로 일치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를 만나는 게 기독교 영성이다. 세상의 틀에 길들여지지 않고 성서가 가리키는 그 세계를 직면하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지적 수준의 고하에 상관없이 기독교 영성과 만나게 될 것이다.

생명(요 1:4), 요한복음 묵상(6) / 정용섭 목사

요한복음에는 ‘생명’(조에)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익숙하다. 익숙하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생명에 대해서 생각이나 하는가? 뻔한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로고스와 생명의 관계를 아는 게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이걸 아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목사들도 대개는 모를 것이다. 모르면서도 설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신자들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목사들은 마음 편하게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목회를 할 수 있다. 사람들만 잘 다루면 목회는 그냥 굴러간다. 그게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로고스는 ..

소음 / 정용섭 목사

시골 생활은 도시의 소음을 피할 수 있다는 데에 가장 큰 장점이 있다. 원당이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경부 고속도로는 2.5킬로, 영천 경주 간 자동차 전용도로와 기찻길은 2킬로가 떨어져 있다. 기차는 뜸하게 다니니 괜찮다. 어떻게 들으면 낭만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나는 소리는 멀긴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자동차 소리는 최소 2킬로 이상 떨어져 있어서 크게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7,8 백 미터 떨어져 있는 공장에서 나오는 소음은 불편하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그걸 별로 크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집사람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딸들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상하다. 똑같은 소음 앞에서 왜 나만 불편한가 말이다. 내 귀가 지나치게..

원당일기(22-1) 원당으로 / 정용섭 목사

지난달 3월15일에 이사를 왔으니, 이제 한 달 여가 흘렀다. 아직도 이삿짐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두 딸은 자기들 일에 쫓겨 전혀 돕지 않고, 집사람도 학교 나가랴 연주회 준비하랴 짬을 내기 힘들고, 나도 이런저런 일로 집안 정리에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 정리라는 게 남의 손을 빌릴 수 있는 거도 아니다. 넉넉하게 마음먹어야겠다.   이곳 생활의 불편한 거를 말하자면, 좋은 점 못지않게 많을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설명하겠다. 오늘은 한 가지만 말하고 가자. 택배 기사들이 우리 집에 오는 걸 싫어한다. 물건 하나 배달하러 최소한 1, 2킬로를 더 들어와야 하니 누가 좋아하겠나. 하양에서부터 우리 집에 단골로 오시다가 영천 지역으로 옮긴 택배 기사가 솔직하게 말해줬다. 원당 물건이 오면 ..

태초에(요 1:2), 요한복음 묵상(5) / 정용섭 목사

태초(아르케)라는 단어가 1절에 이어 2절에도 나온다. 똑같은 문장이다.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고대인은 태초를 왜 생각했을까? 현대 물리학은 우주가 125억년 정도 된다고 주장한다. 태초는 125억 년 전의 어느 순간을 말하는가? 그 이전은 또한 무엇인가? 그 이전은 없다. 시간은 창조 이후에 시작된 것이기에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걸 우리가 어찌 안단 말인가.   우주의 태초는 너무 거시적인 차원이니 접어두고, 각자의 태초를 보라. 우리의 아르케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바로 그 순간이다. 60년 전, 50년 전, 20년 전에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난자와 정자는 더 먼 미래에 기원이 있다. 어디까지 갈는지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다.(수 22:21-34) / 신동식 목사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자신들의 제단을 쌓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요단 서편 지파들의 오해는 해소됩니다.오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기에 두 지파 반은 충실하게 설명을 합니다. 항상 오해는 상대방의 말을 듣기 전에 흘러다니는 소리에 반응할 때 일어납니다.요단 동편의 지파는 자신들이 제단을 쌓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자 함이 아님을 항변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단을 쌓는다면 벌을 내리시고 구원하지 말라고 탄원합니다.자신들이 단을 세우는 목적은 후일에 한 지파됨을 서로 알게 하고, 하나님께 분깃을 받는 존재임을 서로가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이 아니라 약속의 증표로서의 제단을 세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제단은 모형이지..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 / 봉민근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        글쓴이/봉민근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완전하고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분의 주권 안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며 다스리신다.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속에서 소리치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성경이 그것을 증명한다.아브라함이 원해서 가나안에 간 것이 아니요요셉이 원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며 요나가 원해서 니느웨로 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바울은 로마로 가야 했고 주님도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를 만드신다.주님의 계획의 톱니바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늘도 돌아간다.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갈 때도..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막 6:30-44) / 김영봉 목사

해설:전도 하러 나갔던 사도들이 약속한 시간에 예수께 돌아온다. 그들은 흥분하여 자신들을 통해 일어난 일들에 대해 보고 한다(30절). 자신들에게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고를 다 들으신 후,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31절)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 자신도 자주 홀로 외딴 곳에 가셔서 쉬시면서 기도하셨다(1:35).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 곳을 찾았다(32절).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 채고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33절).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열망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34절)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다(34절). “불쌍히 여기셨다”로 번역된 헬라어(‘스프랑크니조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