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전도 하러 나갔던 사도들이 약속한 시간에 예수께 돌아온다. 그들은 흥분하여 자신들을 통해 일어난 일들에 대해 보고 한다(30절). 자신들에게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고를 다 들으신 후,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31절)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 자신도 자주 홀로 외딴 곳에 가셔서 쉬시면서 기도하셨다(1:35).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 곳을 찾았다(32절).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 채고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33절).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열망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34절)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다(34절). “불쌍히 여기셨다”로 번역된 헬라어(‘스프랑크니조마이’)는 1장 41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속이 탈 정도로 공감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배에서 내려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을 가르치신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제 그만 사람들을 해산시켜 각자 끼니를 해결하게 하자고 제안한다(35-36절).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절)고 하신다. 제자들은 음식을 사다가 무리를 먹이라는 뜻으로 알고 자신들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고 답한다. “데나리온”은 당시 통용되던 로마 화폐로서 성인 남성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이백 데나리온은 성인 남성 노동자가 이백 일 동안의 품삯을 고스란히 모아야 만들 수 있는 큰 돈이다. 오늘의 기준으로 하루 일당을 백 달러로 잡으면 2만 달러가 된다.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는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38절)고 하신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그분은 그것을 받아 드신 다음, 사람들을 오십명 혹은 백명씩 둘러 앉게 하신다(39-40절).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는 표현은 시편 23편을 생각나게 한다. 34절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라고 쓴 것을 보면, 마가는 이 사건에서 시편 23편을 생각했고,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상상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41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 여기 사용된 네 가지 동사(“들다”, “축복하다”, “떼다”, “주다”)는 후에 성찬 예식의 틀이 된다. 제자들이 그대로 했더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고(42절), 남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43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남자 어른만 따져도 오천 명이었다(44절). 여성과 아이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묵상:
'오병이어'(다섯 개의 빵과 생선 두 마리)의 이적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초대 교인들에게 중요하게 기억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을 가장 중요한 이적으로 여긴 것처럼, 초대 교인들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장 중요한 기적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가장 분명하게 경험하게 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사건은 매우 암시적으로, 어떤 사건은 상당히 분명하게 또 어떤 사건은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현존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잠시 동안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 같은 경험을 그들에게 선사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눈 뜨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이 사건이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초대 교인들이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독자에게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여호와)은 나의 목자시니”(1절)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시편의 고백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분은, 당신이 어디를 가나 따라 다니는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생각하시고 그들의 절망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무리를 “풀 밭에 앉게 하신” 대목에서는,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치상을 차려 주시고”(5절)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마가는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찬 식탁에서 집례자가 빵과 포도즙을 “들어” “축사하고” “떼어” “주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것처럼, 인생의 광야길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빈 들에서 오병이어로 큰 무리를 먹이신 주님은 영원한 오병이어로서 하나님의 손에 들려 찢기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며 당신이 찢기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믿는 이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자주 나누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기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 주님께서는 빈 들까지 따라나와 말씀을 듣던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만나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황량한 빈 들이 갑자기 천국으로 변모 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로서 그들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고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 그 은혜가 오늘 저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 없는 저희의 인생은 빈 들과 같습니다. 저희의 눈을 열어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는 고백이 저희에게 진실이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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