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45절의 "재촉하여"라는 말은 강제로 보냈다는 뜻이다) 무리를 해산 시키신다. 그리고는 홀로 산에 들어가 기도하신다(46절). 예수께서는 밤이 늦도록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거슬러 부는 바람으로 인해 호수 가운데서 맴돌고 있었다(47절).
예수께서 기도 하시던 곳에서는 호수가 내려다 보였던 것 같다. 그분은 제자들이 바람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시다가, 새벽이 되어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 가신다. 그분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48절) 하신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 “지나쳐 가시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출 33:19, 22; 34:6; 왕상 19:11). 따라서 마가는 이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즈음 제자들은 심신이 지쳐 있었기에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안심하여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아라”(50절)고 말씀하신다. “나다”(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출 3:14)을 생각나게 한다.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새번역에는 "나는 나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헬라어 번역 구약성경(칠십인역)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 호 온”을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이다.
인간은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규정할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다"(I Am) 혹은 "나는 나다"(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이라면, “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감지 했을 것이다.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파도는 잔잔해 졌다(51절). 전날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신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제자들은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52절)기에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 차리지 못하고 놀라기만 했다.
그 사이에 벳세다로 향했던 배는 바람에 밀려 게네사렛 가까이에 이르렀다. 제자들은 닻을 내리고 배에서 내렸는데, 사람들이 벌써 그 사실을 알아 보고 몰려 든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신다. 치유의 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처럼 그분의 옷술에 손만 대어도 치유가 일어났다(53-56절).
묵상: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며,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분이고,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품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7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가장 낮은 곳에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8-10절).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분의 옷자락일 뿐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뒷모습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는 지나가십니다. 정면으로 대하면 숨이 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 존재의 가장 작은 원자 안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1절)라고 했고,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4절)라고 했습니다. 온 우주에 비하면 우리의 존재는 티끌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티끌만도 못한 우리의 존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할 때 언어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언어는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는 데는 무력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클수록 하나님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명석한 사람들은 머리로 납득 되어야만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신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설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경험 했을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건의 놀라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서를 읽으며 만나야 할 대상은 "나는 나다!"라고 당신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그 어떤 언설로도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폭풍이 부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매일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해주십시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매일 주님의 뜻을 찾게 해주십시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매일 저희 자신을 돌아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 뜻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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