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고발 거리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떠나간 후, 예수님은 무리에게 정결(거룩함)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다. 당시 믿음이 좋다는 유대교인들은 부정한 것을 접촉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결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레위기 11장은 먹어도 될 것과 먹으면 부정해 지는 것을 구분해 놓았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5절)고 말하심으로 정결례에 관한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을 모두 부정하신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16절)은 일종의 비유로서, 일차적으로는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배설물을, 의미적으로는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20-23절)을 의미한다.
무리와 헤어져 예수님과 따로 있을 때, 제자들이 그 비유의 의미에 대해 여쭌다(17절).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 부족을 책망하시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음식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라고 답하신다(18절).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19절)는 말씀은 레위기 11장의 율법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예수님은, 정결례에 대한 율법 규정이 그 시대의 필요성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보셨다. 이 말씀에서도 자신이 모세의 권위 위에 있다는 예수님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정말 경계할 것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 인해 몸에 부정 타는 것이 아니라, 내면(마음)이 부정해지고 그 부정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22절에 열거된 목록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여러가지 악덕들이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은 십계명이 금지한 “악행”에 속하고,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은 “악한 성품”에 속한다.
묵상: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레 11:44).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조상들이 이 명령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조상들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 수준의 거룩함”을 이루겠다는 뜻으로 결성된 종교 운동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구분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자신들을 부정하게 하는 음식과 물건과 사람과 장소를 철저하게 피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들이 “남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때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집착은 그들로 하여금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와 “자기의”와 “위선”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형식주의”란 율법의 정신에는 관심 없이 문자적인 실천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권위주의”는 자신들이 율법에 대해 바로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다는 허위 의식에서 나왔습니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게 살면서 율법의 자구를 지키고 있으니 의롭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기의입니다. 외면적으로는 거룩한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자로 자처했고, 율법 실천에 있어서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배척하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은 거룩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는 말씀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라는 말씀은 모두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부정타지 않게 하라는 율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심으로써, 진정한 거룩은 성품이 변화되고 삶의 방식이 변화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자구를 지켜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변화되어야 진정한 거룩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영성의 성숙은 부정타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변화 받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또한 차별과 정죄와 저주와 배척이 아니라 포용과 용서와 축복과 화해로 열매 맺어집니다.
기도:
주님, 저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께서 온전히 다스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의 부정한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저의 입술의 모든 말과 손과 발의 모든 움직임이 주님 뜻에 조율되게 해주십시오. 저의 존재가 주님 손에 들린 인형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의 마음에 사랑만 가득하게 하시고, 저의 눈빛과 말과 행동에서 사랑만 나오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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