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찾으신다(1절). 가족과 고향 사람들은 그분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소문을 불식시키는 것도 방문의 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안식일이 되어 그분은 회당 예배에 초청 받아 설교를 하신다. 동네 사람들은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 지혜와 권위에 놀란다. 또한 그분이 행하신 여러가지 기적들에 대해 전해 듣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2절). 그들은 그가 마리아의 아들로서 목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3절). 헬라어 ‘테크톤’은 목재와 석재를 다루는 기술자를 가리킨다. 또한 그분의 남동생들과 여동생들도 알고 있다.
그분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보통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 보이니, 동네 사람들은 그분을 어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달갑지 않게 여겼다”(3절)는 말은 그분을 의심하고 꺼렸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에서는 “거역했다”고 번역해 놓았다. 그들은 소문처럼 예수가 미쳤거나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5절) 별다른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5절). 이적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적을 행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가장 믿어야 할 사람들이 가장 믿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에 대해 탄식하면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4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당시의 속담이었다.
묵상:
믿음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생명체는 부단히 굳은 껍질을 깨고 새로운 순을 돋아 냅니다. 믿음도 굳어버린 전통과 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된 지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우편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체험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것 만으로도 구원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욱 그분을 알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분을 더 깊이 알려면 과거에 그분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는 그분의 모습을 받아들여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그분에 대해 몰랐더라면 그분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잘못을 우리도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미 다 알았다는 생각 혹은 더 알 필요 없다는 생각이 우리의 믿음을 죽게 만듭니다.
껍질 안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처럼, 신앙인들도 굳어버린 껍질에 갇혀 죽었으면서도 죽은 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른 가지에 새 순을 밀어내는 뒷뜰 나무처럼 우리의 믿음도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기도: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더욱 온전히 사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주님 뜻에 더 일치되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저의 굳은 껍질을 깨뜨려 주시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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