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여인에게 치유를 확인해 주신 다음, 예수님은 무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셨다. 그러는 중에 회당장 집에서 심부름꾼이 찾아 와 야이로에게, 딸이 방금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모셔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35절). 그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신다(36절). 예수님은 당신과 관계된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면 세 제자에게만 보게 하셨다. 그 일들은 부활 사건 이후에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세 제자에게만 보게 하신 것이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니 이미 사람들이 곡을 하고 있었다(38절). 당시에는 장례가 나면 가족의 슬픔을 도와 주기 위해 곡을 잘 하는 사람들을 초청 하곤 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곡을 멈추려고 하시고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고 하신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그 아이는 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분을 비웃는다(40절).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부모와 세 제자들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신다. 그분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람어로 “달리다굼”(41절, “소녀야, 일어나거라”) 하고 명령 하신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죽은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해진다. 예수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아이의 손을 잡으신 것이다. 그러자 열 두 살의 소녀가 눈을 뜨고 일어나 걸어다닌다. 그것을 지켜 본 부모와 세 제자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예수님의 능력에 놀란다(42절).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43절).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그 방을 나와 모여 있는 무리 사이를 헤치고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고 나서 죽은 아이가 살아난 사실이 드러났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묵상: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낼 때 부모와 세 제자에게만 보게 하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런 사건일수록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일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소녀를 살려 내신 후에도 무리에게 알려지기 전에 그곳을 빠져 나가십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처사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셨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경우에 세 제자에게만 보게 하십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중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을 때(9:2-8)에도 그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셨습니다(14:32-42).
세 제자만에게만 따로 보이신 이유는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나서야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 후에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세 제자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9:9)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너무도 놀랍고 신비한 일이어서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세 제자는 비로소 소녀를 살려낸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거라”(41절)로 번역된 ‘에게이레’는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켜 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그 소녀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세 제자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 당신이 죽음 너머로 그들을 인도하실 분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기도: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으신 주님, 주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반대로, 주님 밖에 있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님을 압니다. 살아 있는 동안 저희로 하여금 주님 안에 머물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고, 때가 왔을 때,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을 믿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처럼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두려워 할 대상은 죽음이 아니라 주님을 떠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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