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영접할 용기 (막 5:1-20) / 김영봉 목사

새벽지기1 2025. 1. 29. 06:41

해설:

예수님과 그 일행은 갈릴리 동편에 있는 이방 마을 거라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신 들린 사람인데 그 상태가 너무도 심했다. 쇠고랑과 쇠사슬로도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연합하여 그를 배척 했기에 그는 공동묘지에서 지냈다(1-5절).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어 알고 계신 것처럼 거라사에 도착하자 곧바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신다. 먼 거리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예수님은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7절)고 명하신다. 영적 세계는 물리적 세계의 거리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귀신은 위기감은 느끼고는 예수님께 달려가 간청한다. 예수님이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7절)이심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의 정체를 묻자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9절)라고 답한다. “군대”로 해석된 ‘레기온’은 6천 명의 군사로 구성된 군단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당하고 있던 귀신 들림의 현상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귀신들은 우선 자신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산 기슭에 놓아 기르던 돼지들에게 보내 달라고 청한다(11-12절). 그렇게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들의 청을 허락 하신다. 그들이 돼지떼에게 옮겨 가자 돼지들이 발작을 일으켰고 집단적인 흥분과 발작 상태에 빠진다(13절). 그로 인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떼죽음을 당한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고용된 일꾼들이었고, 돼지떼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사서 공동으로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일꾼들은 주인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알린다. 동네 사람들은 짐승같던 사람이 제 정신이 들어 온순해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자초지종을 들은(14-16절) 그들은 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감당할 수도 없었다. 이천 마리의 돼지를 한 순간에 잃어 버린 것도 그렇지만, 그 모든 사태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분이 동네에 들어온다면 그와 유사한 혼란이 계속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동네를 떠나 달라고 간청한다(17절). 그들은 지금껏 살아온 그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배에 오르려 할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함께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18절). 예수님은 그의 청을 완곡히 거절 하시면서 집으로 돌려 보내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은혜를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라고 하신다(19절). 그 말씀 그대로 그는 자기 동네뿐 아니라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한다(20절). “데가볼리”는 요단 강 동쪽에 있었던 열 개의 이방 도시를 가리킨다. 이로써 이 사람은 이방 지역에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 

 

묵상: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는 것은 혼란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 혼란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물질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고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던 세상이 온통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그동안 목적 삼았던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동안 익숙했던 삶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편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떠나가 달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 보고 그분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생명과 희망을 얻는 길인데, 그들은 그동안 살고 있던 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분을 동네로 모셔 들이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하여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진실입니다. 혹은 그분을 받아 들인다 해도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가장 자리에 모셔 둡니다. 그분이 만들어 내는 변화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이 너무도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잃을 것을 볼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는 아직도 저희의 삶을 저희가 만들고 싶어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지만, 저희가 원하는 만큼만, 저희가 불편을 겪지 않을 만큼만, 저희가 손해 보지 않을 만큼만 주님이 참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마음이 거라사 동네 사람들의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 주님” 하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저희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제는 온전히 주님께 항복하기를 원합니다. 온전히 다스림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