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4 12

단호함이 결여 된 아비가 초래한 참화(삼하13:20-39) / 리민수 목사

단호함이 결여 된 아비가 초래한 참화(삼하13:20-39) 본문은 다말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누이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보복 살해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불행히도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10)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최초로 성취된 사건이다. 앞서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추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근친상간이 죄를 범한 암논을 엄히 다스려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듣고서 단지 노하였을 뿐(21절) 어떠한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하고도 미온적인 아비의 태도가 불러온 엄청난 참화였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 / 이금환 목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4-45) 사람이 높아지고, 으뜸이 되려는 지향과 의지를 주님은 결코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막10:42)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으뜸이 되면 볼 수 있는 것도 많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고, 누릴 수 있는 것도 많고, 부릴 수 있는 권세도 많고, 으스댈 수도 있고, 자랑할 수도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니 안 높아지려고 하고, 안 으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저절로 ..

말씀과 하나님(요 1:1), 요한복음 묵상(4) / 정용섭 목사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문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할 수 있다. 어쩌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 오류의 하나는 신인동성동형론이다. 이런 문제는 포이에르바흐나 프로이트, 니체 등이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하나님을 인간의 자기 투사로 여기는 것이다. 초자아가 곧 하나님 표상이 된다. 하나님을 자기의 완벽한 복사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의 비판은 일리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머리에 하나님은 슈퍼맨이나 산신령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말한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로고스는 창조..

언어 존재론(요 1:1), 요한복음 묵상(3) / 정용섭 목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렇다면 사물이나 사람이 생기기 전에 말씀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여기서 말씀은 단순히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위한 말이 아니라 만물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힘이다. 헬라 사람들은 그 힘이 바로 언어, 즉 로고스라고 생각했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이데아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데아로부터 나왔다. 이데아가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보다 선재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어떤 사물은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다. 거기에 이름을 붙일 때만 그것의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이런 점에서 사물보다 말이 먼저 있었다고 봐도 된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도 이런 이유다. 성경이라는 문자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

로고스(요 1:1), 요한복음 묵상(2) / 정용섭 목사

요 1:1절에 나오는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다. 성경 각주에도 그 사실이 지적되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구약 70인 역에도 나온다. 70인 역은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70명의 유대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된 구약성경이다. 내용은 원래 구약성경인 히브리 성경과 비슷하지만,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로고스가 70인 역에 나오긴 하지만 원래는 헬라 철학의 중심 용어다.   고대 헬라 철학의 3대 학파는 플라톤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스토아학파다. 이중에서 로고스 개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학파는 스토아다. 그들은 세상을 조화롭게 운행되는 코스모스로 보았다. 그런 코스모스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로고스다. 로고스를 언어, 이성 등등의 의미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다 전달되지는 않..

대나무 / 정용섭 목사

며칠 전에 집 뒤편의 일부 대나무를 잘라냈다. 대나무가 참나무의 성장에 방해가 되어서다. 대나무는 번식력이 대단하다. 뿌리가 막무가내로 뻗쳐나가면서 주변의 식물들을 작살낸다. 생태파괴의 주범이다. 그런데 나는 대나무가 좋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약한 바람에도 춤추듯 흔들리는 모습이 좋다. 동향이라서 집터로는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원당리 113-2번지 땅을 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대나무 숲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고민 중이다. 대나무가 뒤편 언덕을 다 채우도록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적당하게 잘라내서 참나무를 보호해야 할지 기로에 섰다. 일단 부분적으로 쳐냈다.   대나무를 쳐냈더니 무덤이 더 가까이 보였다. 첫 번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봉분 윗부분만이 아니..

태초에 말씀이..., 요한복음 묵상(1) /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수요 성경공부 모임은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시작했다. 앞으로 당분간 나는 요한복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재미있게 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은 어떤 세계를 담고 있다.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연구했지만 여전히 다 밝혀지지 않은 세계를 말이다.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경계까지 가보도록 노력하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뒤늦게 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을까? 그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직접 그것을 읽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복음서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로는 뭔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일까?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

무분별한 과시욕, 뻗치는 망신살!(에스더 1:9-12) / 원용일 목사

무분별한 과시욕, 뻗치는 망신살!(에스더 1:9-12)‘결국 술이 문제!’라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사건이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벌어졌습니다.아하수에로 왕이 잔치의 마지막 순간에 뭔가 과시하고 싶었던 욕구는 무엇이었을까요?에스더 1:9-12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10 제 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6개월..

교회의 정체성 / 봉민근

교회의 정체성        글쓴이/봉민근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의 정체성을 모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겨우 예배만 드리면 모든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 자신을 바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다.참된 공동체는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한다.주님께서 자신을 드려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남을 생각하며 섬기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다.예배 시간에 은혜받았다고 눈물 콧물 흘려도 세상에 나아가 빛이 되지 못하면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니다.참된 교회는 하나다.말씀으로 하나 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며 기도로 하나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다.교회 공동체는 말씀과 사..

죄의 속성 (막 6:14-29) / 김영봉 목사

해설: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당시에 갈릴리를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에게 전해진다. 그는 “안디바”(혹은 “안티파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헤롯 대왕의 일곱째 아들이다. 로마 황제는 주후 6년에 그를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를 넷으로 나누어 자식들에게 분할해 주었기에 정확한 칭호는 “분봉왕”(영토의 일부만 다스리는 왕)이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추측 하기도 했고, 죽지 않고 들림 받은 엘리야가 돌아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겼다(15절). 그 소문을 듣고 헤롯 안티파스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16절) 하고 두려워 했다.     이 지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