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참 신앙의 문장 부호

새벽지기1 2020. 2. 2. 09:09


참 신앙의 문장 부호


어느 대학 교수가 문학과 관련한 강의를 하고 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동사’가 언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고 이렇게 설명했다.

“동사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행동이야말로 모든 글의 중심이 됩니다.”
학생이 그 교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명사는 사람과 사물을 나타냅니다. 저는 사람과 사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교수는 내기를 하자고 제의했다.

내가 명사가 없는 문장을 만들 테니, 학생은 동사가 없는 문장을 만들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수는 칠판에다 썼다.

“항복해!”
그러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는 자신이 내기에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은 칠판으로 걸어 나와 이렇게 썼다.

“바보!”


글을 완성하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화룡점정 같은 문장 부호다.

마침표가 없으면 문장이 완성되지 않고,

쉼표가 없으면 글이 뒤섞이고,

물음표가 없으면 독백이 되고,

느낌표가 없으면 감흥이 없고,

따옴표가 없으면 너무 주도적일 수 있고 편협하고 옹색해질 수 있다.


인생도 그렇다.

여러 가지 삶의 부호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인생이 다듬어지고 깊은 맛이 나고.

생활 속에 적절히 자리 잡고 있어야 멋진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수많은 문장 부호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주님을 부를 때 어떤 사람은 오! 주님! 하면서 감탄사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

떤 이는 어찌하여 주님? 이라고 부르면서 의문사로 부르는 사람,

어떤 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주님을 부르짖는 사람,

깊은 신음과 탄식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 등등

각자의 삶의 정황과 처지에 따라 곡조는 달라진다.

삶, 결혼,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각자에 따라 어떤 문장 부호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kiss의 품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론적으로 명사, 혹은 동사라고 말할 것이다.

키스를 명사와 동사로만 알고 있는 문법적인 사람보다

사랑에 빠져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키스는 감탄사라고 말할 것이다.

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면 키스는 접속사라 말할 것이고

사자성어로 말하라면 설왕설래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경 에베소서를 원문으로 읽으면 크 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시(poem, 詩)라고 되어있다.

그러니 하나님은 시인 (poet)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시(詩)들을 하나의 몸(교회)으로 표현하셨는데,

우리 크리스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의 시(詩)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나 문장, 혹은 문장 부호가 된다.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을 통하여 아름다운 시의 음률을 만들어 내신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그가 만드신바”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선언이다. 그

런데 여기서 ‘만드신 바’(handiwork)는 창조물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포이에마’(ποίημα)이다.

포이에마라는 단어에서 시를 의미하는 어 ‘poem’이 파생되었다.

우리가 곧 ‘하나님의 시’라는 의미인 것이다.


시인은 시를 짓기 위해 언어를 다듬는다.

절제와 압축의 미학으로 언어를 재창조해내는 과정을 통해 시가 탄생하듯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로 만드시는 시인이시다.

최상의 도공이 수백 수천 번을 깨버리고 마침내 한 점 얻은 최상의 도자기 같은 존재다.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걸작 품,

최고의 작품, 최고의 명품(masterpiece)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비뚤어지지 않은 바른 성을 지녔다면

온 누리에 가득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를 향한 주님의 크고 작은 사랑의 섭리를 헤아려 볼 때마다

그저 숨 막히는 감탄만이 있을 뿐이다.


감탄사가 없는 하루는 축복의 하루일 수가 없다.

감탄사가 없는 기도는 진정한 감사의 기도일 수 없다.

감탄사가 없는 찬양은 낡은 레코드판의 지쳐버린 회전일 뿐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오! 주님!” 하고 한번만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훌륭한 기도요 원초적인 찬양이 될 수 있다.

호흡마다 숨결마다 주님을 감탄사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21세기의 시편 기자가 될 수 있다.

무감각한 예배 순서지의 토막토막 사이에 순수한 감탄사가 들어와 자리 잡을 때

주님이 원하시는 살아있는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가능해질 수 있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강철 같은 의지의 철인이 아니라

벽돌 틈에 피어난 들꽃 한 송이에도 감동할 줄 알던 어느 신앙인 이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은 나와 함께 감탄사를 나누기 원하시는 사랑에 목마르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엄청난 사랑의 감격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온 누리에 가득 가득 사랑한다는 말로 도배를 해 놓으셨다(참고, 시8편, 19편, 찬송가40장).

주님의 사랑은 온 대지 위에 작은 깃발이 되어 펄럭이고 있다.

이 깃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참 신앙의 문장 부호는 내 삶의 색깔을 반추한다.
나의 신앙의 문장 부호가 더 많은 감탄사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