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언어 속에 녹아든 음식과 관련된 표현들

새벽지기1 2020. 1. 30. 04:45


언어 속에 녹아든 음식과
관련된 표현들


한국 민족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특성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한국 사람을 이해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이 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언어를 배울 때, 아랍어 다음으로 어려운 게 한국말이라고 한다.

한국말이 무지 쉬운 것 같은데 그들에게는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말에는 비유적인 표현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비유 중에는 ‘먹는다.’는 표현이 참 많다.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배우면서 ㄱㄴㄷㄹ 그것은 사실 한 시간이면 다 읽는다고 한다.

문제는 대화를 조금 하다보면 온통 모르는 말,

그 다음에 표면적인 말이 아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고생했다는 표현을 애 먹었다고 한다.

애만 먹는가? 우리는 물먹는다고 한다. 물만 먹는가? 우리는 골탕도 먹는다.

그 다음에 욕도 먹는다. 뇌물도 먹는다. 사실은 애지간한 것 다 먹는다.

우리는 마음도 먹는다. 사회 물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말이 씨가 안 먹힌다고도 한다.

주먹으로 치고받을 때도 한방  먹다고 하고, 맞았을 때도 한방 먹었다고 한다.

 챔피언도 먹는 것이다. 시험보고 떨어졌을 때도 낙방 먹었다고 한다.

나이도 한살 더 먹는다. 축구에서도 한골 먹었다고 한다.


사람들에 대해 표현할 때도 설익었다는 표현을 한다.

키가 크면 싱겁다고 하고, 인색한 사람을 두고 짜다고 표현한다.

부부의 행복지수를 깨가 쏟아지는 것으로 표현한다.

음식이 기름기가 많거나 비위에 맞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행동이 느물거려 거스르는 사람을 느끼하다고 한다.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때, 이게 웬 떡이냐! 라고 한다.

일을 그르치면 죽 썼다고 한다. 쉬운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도 한다.

심지어 남녀의 성관계를 이르는 말도 따먹는다는 저속한 표현으로 말한다.

인터넷 웹사이트를 표시할 때 (@)에트를 골뱅이라고 부르는 민족은 우리 민족 밖에 없다.

우리는 언어가 형상화 된 우뇌적인 언어로 아주 발달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민족이 수백 번의 외침의 역사 속에서 독특하게 체화되고 형성된 언어의 형태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도 good morning 조차도 굶었니? 라고 표현할 만큼 먹는다는 표현이 넘쳐난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는 말이 민족적인 인사가 될 수 있었던 아픔도 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우리 민족은 무엇이든 먹고 소화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외침 속에서 전쟁을 치루며 생존할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이

고도로 음식을 통하여 축적되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고로 우리 민족의 음식의 독특성이 발효식품으로 많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추장, 된장, 김치, 각종 생선을 삭혀 발효시킨 젓국, 각종 음료수들을 보라.

식혜, 감초, 막걸리, 등등. 김치를 먹어도 앞집, 뒷집 각각의 누가 만들었는지 다 안다.

그것을 손맛이라고 하고, 장맛이라고 한다.


한국어는 모음 하나만 바꾸면 부정이 긍정이 된다. 시래기 국이 그렇다.
세계 어느 나라도 비틀어 말라빠진 야채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냥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 쓰레기를 시래기로 만든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그 어떤 음식보다 비타민이 풍부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누룽지도 마찬가지다. 밥이 타버렸다는 그 ‘부정’을 누룽지라는 긍정의 문화로 만들어 낸다.

6.25 때 미군이 들어왔을 때도 무질서한 한국인을 보며 미군은 경멸을 던졌다.

하지만 얼마 후 그 경멸은 존경으로 바뀌었다.

자기들이 버린 맥주병을 재활용해서 집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포탄을 녹여 사랑의 종을 만들어 교회로 가져가고

총알자국이 남은 헬멧을 두레박으로 바꿔 생명수를 길어 나른다.

그것이 한민국이요 그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읽고도 내일이면 또 금방 잊어 먹는다.


언어의 신비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학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회의에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글이 언어학적으로나 음성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글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현존하는 문자 중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언어는 긴 문장이 아니어도 비록 짧은 단어라도 억양과 소리만 가지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길다’ ‘멀다’ ‘또는 ‘짧다’는 것을 표현을 할 때,

단어나 문장을 더 늘이지 않고도 ‘긴~ ‘만큼, ‘먼~ ‘만큼 그리고 ‘짧은 만큼’

억양만 늘이거나 짧게 줄이면 그 자체로서 표현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특징과 장점이 있다.

그것이 가장 잘 발현되는 것이 소위 소리꾼들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국악, 그 중에서도 창이라는 장르를 통해 드러난다.


한국어의 우수성을 여러 면에서 살필 수 있지만

영어와 단순 비교를 해보아도 략 놀라운 차이점들이 있다.

한국어 문장은 주어, 동사, 목적어 등의 순서를 마구 섞어버려도 의미가 똑같이 보존된다.

반면, 영어는 주어와 동사의 순서만 바꾸어도 평서문이 의문문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한국어의 어휘는 인간의 미묘한 감각차이마저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예를 들어서 영어에는 노란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거의 “Yellow”밖에 없는 반면에,
한국어에는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누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등등의 수많은 뉘앙스를 가진 노란색의 단어들이 존재한다.


우리말에 올라갈 때, 내려갈 때를 합쳐서 오르내린다는 표현의 승강기라는 말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엘리베이터(Elevator)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내려올 때 계단으로 내려오느냐 하면

그렇지 않지만 올라갈 때만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어차피 엘레베이트는 내려간다는 의미보다 올라간다는 의미에 속한다.

론 저들에게는 에스컬레이터(Escalator)가 있지만

그나마 승강기 개념인 엘레베이트에 이르지 못한다.

미국 사람들은 draw를 끄집어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빼닫이라고 한다.

밀고 닫는 것을 미닫이라고 하고, 열고 닫는 것을 여닫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다른 나라 어디에도 있지 않은 한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어령 씨가 말한 로 ‘엇비슷하다’라는 말이다.

비슷하면 비슷한 것이지 엇비슷하다는 말은 비논리적인 표현이다.

어긋나면 어긋나고 비슷하면 비슷한 것이지 어떻게 같이 존재하는가?


숫자와 관련하여 우리는 정(情)과 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리어카에 과일을 사고 팔 때를 보라.

과일을 살 때 정확한 개수를 말하지 않아도

두어 서너 개, 너 댓 개, 혹은 여 나무 개, 여섯 개, 예닐곱 개 등등

어느 하나를 말하면 주인이 알아서 준다.

거기다가 덤으로 주거나 심지어는 뺏어가지고 오기도 한다.

서양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찍이 괴테는 “한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언어 속에 그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와 얼이 고스란히 담겨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세계화란 우리의 독특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차별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땅에 수많은 민족의 언어들이 존재하고

같은 민족들 중에도 방언이 존재하듯이 하늘에는 천사들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하늘나라의 공통 언어는 히브리어일까, 헬라어일까, 아람어일까 아니면 각 나라의 난 곳 방언일까?

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서 바울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천사들의 고유한 하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의 언어는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언약의 말씀이다.

성경의 언어는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언어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탁월함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감사한 일이며 인간의 복된 일임을 새삼 깨달아본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언어의 소중함과 말씀으로 교통하시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
운 신비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