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탄사

새벽지기1 2020. 2. 1. 07:07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탄사


감탄은 마음속 깊이 느끼어 탄복하는 것으로,

포유류 중에서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탄을 하고 싶은 마음,

그러한 찬사를 받고 싶은 마음이 다분히 내재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에펠탑, 나이아가라 폭포등 유명한 관장 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와!” 하는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다면 굳이 그곳을 찾을까?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헉헉대며 올라간 산 정상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 “와!” 하는 감탄,

발아래 펼쳐진 장관이 기막히게 경이로워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성취감은

그렇게 외마디 감탄으로 표출된다.


감탄은 모든 일의 원동력이다.

박물관, 미술관을 찾는 것도 고대 유물이나 예술 작품을 보며 감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스스로 감탄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감탄은 행복이라는 불을 피우기 위해 불빛을 내는 부싯돌과 같다.

시회에서 감동을 하고 각종 음악을 듣고 오케스트라에서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고

여행에서 낯선 감동을 받고, 등산에서 야호~!하며 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결정되는 순간의 감동은 눈물겹다.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 장엄한 지구를 처음으로 바라보며 환호와 감탄과 탄성을 자아낸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하루에 몇 번 감탄하는지에 있다고 말한다.

감탄을 많이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감탄 소리가 많이 새어나오는 곳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소이다.

감탄은 우리 몸의 체질을 바꾼다.

단 한 번의 감탄만으로도 행복 호르몬이 쏟아지게 한다.

당연히 마음의 바다에도 행복의 파도가 출렁인다.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모두가 감탄의 부싯돌이 될 수 있다.

감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감탄 한번 하는데 많은 비용이 든다.

작은 것에서 감탄하지 못하면 여간 큰 것에서도 무감각, 무덤덤한 마음에

점점 요란하게 화려하고 사치스런 장식을 해야 비로소 감각의 센서가 발동한다면 말이다.


엠마뉴엘 칸트는 인간이 가장 놀라운 감탄을 하여 행복해지는 순간은

엄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환호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이것을 장엄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 그 중에서도 가장 궁극적인 경험은

경이롭고 장엄한 자연 앞에서 ‘와~’하고 숨 넘어 갈 듯 내 뿜는 감탄이라는 것이다.

성욕이나 식욕은 동물들도 다 있지만 감탄은 인간만이 가진 근본적인 욕구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의 작은 변화에도 감탄하면서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 뒤에는 감탄이 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감동하고 우리의 삶을 감동하며

나의 존재를 가장 잘 감동할 수 있는 최고의 노래요 선물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감사와 감동과 감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이보다 더 좋은 감사와 감동과 감탄을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다.

찬양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감탄하고 감동하는 것이다.

시심이 깊은 사람은 가을 산에 가지 않아도 공원에서 주워든 노란 은행잎 한 장에서

가을 전체를 포착하고 음미할 수 있다.

시인의 눈으로 보고 시인의 가슴으로 감동하고

시인의 입술로 노래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시인은 마른 갈 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창조주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있다.


시편 8편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찬사이며, 영혼의 탄성이며 감격의 고백이다.

다윗은 최고의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는 시를 썼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주의 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라고 노래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3-5)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최고의 찬사와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


감사와 감동


인간은 압도적인 감탄을 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 감정의 기복, 성욕, 식욕 등은 동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동물도 적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무리 집체만한 적이 나타나더라도 막아낸다.

심지어는 고도의 훈련과 조련으로 어느 정도는 사람과 동물이 교감을 한다.

그러나 동물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감동과 감탄이다.

물로서 아무리 뛰어난 원숭이라도 사람 같은 감동을 느낄 줄 모르고 감탄을 할 줄 모른다.

인간만이 감동하고 감탄하며 웃을 수 있는 존재다.


포유류는 태어나자마자 혼자서 어미젖을 찾아 먹고 혼자서 걷는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한다.

그런데 인간만은 덜 자란 미숙아로 태어나서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인간이 그런 수준이 되려면 18개월 후에 태어나야 한다.
그런데 9-10개월 만에 태어난다.

나머지 기간은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면서 감탄하는 시간이다.

어머니들은 아기를 키우는 동안 계속해서 감탄한다.

래서 엄마는 아기의 미세한 발전에도 감탄을 한다.

이렇듯 인간은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부모로부터 감탄을 받지 못하거나 내버려진 아이는 일 년 정도 발전 속도가 늦다고 한다.


엄마는 어렸을 때의 아이에게 끊임없이 감탄을 한다. 감탄 100%에 가깝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면서

아이의 작은 변화에도 감탄하면서 아이를 어른으로 키운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감탄은 점점 적어진다.

어느새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상대적 경쟁자로 보고 올라서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성공의 결과보다는 끈기 있게 노력하는 모습에 감탄할 때에 도전을 받는다.

노력을 칭찬하면 아이는 조금 더 어려운 난이도에 도전한다.

그러나 성공에 감탄을 하면, 아이는 실패할까봐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명을 구하는 포옹”(Rescuing Hug)이라는 쌍둥이에 관한 사랑의 실화가 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아무도 만져주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도 한다.

지금 누군가 우리의 포옹을 필요로 하고 있다.

군가 우리의 사랑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 한 우리의 손과 목소리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치료, 사랑, 승리를 주고자 하신다.


도덕성의 결핍이 문제가 되지만 남자들이 어두운 문화를 향유하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감탄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을 찾으려면, 게임에 뺏긴 아이를 찾으려면,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면

정서를 공유하고 스킨십을 하고 감탄을 되찾을 때 가능하다.

남자들이 정서 공유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한국인의 정서가 ‘남자 놈이 왜 울어! 남자는 약해지면 안 돼’ 등등

정서공유 능력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국 사람들은 언제나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남자들은 40~ 50가 되면 입 꼬리가 내려온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행복 하고 싶은가?

행복하려면 감탄사를 많이 연발하라.

깊은 산속의 옹달샘이 맑은 까닭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감사와 감동의 샘물을 날마다 퍼 올리는

21세기의 시편 기자로 시인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