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상처는 인생의 보물 지도

새벽지기1 2020. 2. 4. 06:48


상처는 인생의 보물 지도


도둑이 무섭다고 창문을 다 벽돌로 막아버린다면 빛도 없게 되고,

공기도 탁해지고 생명체는 서서히 죽게 된다.

그러므로 깨지기 쉬운 창도 필요하다.
단단한 자기껍질에 둘러싸인 마음보다 차라리 상처를 잘 받는 마음이 낫다.
현인들은 살기 위해 강한 껍질을 선호하지만

진짜 사는 길은 깨지기 쉬운 창을 통해 창문 너머를 보는 길이다.

깨지기 쉬운 창이라도 있어야 이웃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독일 여성 신학자 죌레는 말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신실하다는 것은 안전의 유혹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일갈했다.

인생에는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다.

그래도 담을 치고 요새를 쌓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다.

나만의 안전을 꾀하려는 ‘이기적인 나’에 한 저항이 필요하다.


헨리 나우헨 역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나’에 안주하는 삶을 거부하고 ‘내 일의 나’를 향해 상처를 각오하는 용기가 희망의 요체다.

상처는 지양(止揚) 할 것이기도 하지만 지향(指向)할 것이기도 하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다.
예수님은 강철갑옷을 포기하시고 상처의 창을 통해 하늘 문을 여셨다.

수님께서 몸을 깨뜨리실 때,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가 깨질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바뀔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강철갑옷을 벗고 자신을 무장해제 시킬 때 행복의 문이 열린다.

인간의 무능함은 하나님의 전능함이 임하는 토양이다.

무능함의 자인은 무책임의 자인이 아니다.

사랑 안에서는 무능함이 유능함이 되고, 상처가 상급이 된다.

상처의 창은 꿈과 꿈이 만나는 통로다.

상처의 창을 통해야 삶이 새롭게 보인다.


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창녀의 친구’다.

마음의 갑옷을 벗으면 창녀도 친구로 보인다.

상처의 창은 나도 살게 하고 세상도 살게 한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다.


사랑이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온 우주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에서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런 산물이다.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결단이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하나님은 아플 수밖에 없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시기하시는 하나님, 후회하시는 하나님, 고통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란

이 모든 표현들은 사랑의 하나님에 한 아픔과 기뻐하심에 한 표현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진실에 한 마음에 상처받을 수 있고

또한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C. S. 루이스라는 국의 유명한 기독인 문학자는

사랑이란 바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다.

인간은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먼저 피차 상방을 향한 깊은 배려와 친절을 통해 그

리스도의 높은 윤리적 건덕을 드러내며 은혜와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넘어서야 할 것은 한 번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평생 원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더 높고 더 많은 요구들을 헤아려볼 여유도 없이 칼로 무를 자르듯

교제의 단절을 가져오는 서글픔을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랑이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님보다 더 상처받은 자 있는가?
세례 요한의 무고한 죽음은 결국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 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진 듯한 상황으로 들어가셨고 그 가운데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철저한 하나님의 침묵과 외면을 경험해야 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상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으시며

그 저주를 다 받으셨다.

하나님 스스로 그 모든 고통의 짐을 다 받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외치는 그 소리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우리에게 침묵하신 이유가 있었음을 설명하셨다.

이것이 수없이 억울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 해 위로가 된다.

하나님의 가슴앓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 같은 모성적인 분이시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고 한다.

이 말에는 ‘창자’ 혹은 ‘내장’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원문의 본래 의미는 내 창자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어 넘어지고 절망하고 낙담해 있을 때,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창자 끊는 마음으로 우리를 애태우시며 돌아보신다는 것이다.

라함이라는 단어에는 ‘자궁’이라는 뜻도 있다.

자궁은 태아를 지키고 보호하고 생명이 있게 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자 끊는 마음만 가지고 옆에서 바라보시며 서있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도와주시고 감싸주시고, 세워주시고, 능력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나의 가슴속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곁에 계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고 낙담과 실망과 절망의 골짜기를 넘어갈 때가 있다.

파도치며 풍랑이 일어나는 인생길에 놓일 때도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창자를 끊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늘 우리는 상처에 해서 생각하고 묵상하고 있다.

우리들의 모든 상처, 내가 다른 이에게 끼친 상처, 내가 받은 상처 등 모두를

우리를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주님께 맡기고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고달픈 삶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님에 대

견고하고도 건강한 신앙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