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19)

새벽지기1 2017. 4. 6. 06:5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1:18)

 

이틀 전 묵상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을 간단히 언급했다. 오늘은 이 사건이 주제다. 이 사건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사이에 일어났다. 요한복음은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단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셈이다. 11:18절은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이다.

 

예수는 왜 유대교 고위층과 충돌했을까? 유대교 권력자들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당하도록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했으니, 악하다고 말해도 잘못 본 거는 아니다. 이렇게만 보면 정확한 게 아니다.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처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좀더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의 여론이 예수에게 쏠리게 되자 시기심에 사로잡힌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막 11:18절도 주민들이 예수의 교훈에 놀랐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수천 명이 예수를 따를 때도 있었다 하니 그들이 예수를 불편하게 여길만하다.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것들이다. 이런 것으로 그들이 예수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거다. 이 충돌은 신학의 문제다. 신학의 차이는 웬만해서 극복하기 어렵다. 피를 불러오는 이단 논쟁이 바로 신학 문제다. 유대교 고위층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가장 대표적인 신학의 차이는 안식일 문제. 이것을 복음서 기자는 여러 번 짚었다.

 

3:1-6절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회당에 들어갔다가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고친다.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어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졌다. 예수의 신학적 논리는 다음과 같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예수가 안식일 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래 선한 제도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극한의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제도를 십계명에 명시하면서까지 지켜내려고 한 것은 잘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데에 있다. 인간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목표로 했던 안식일 개념이 억압과 위선의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거부했다. 적당하게 타협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거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손에 장애를 가진 사람은 오래 동안 장애자로 살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고쳐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서 인간미가 없다거나 유대교 당국자들의 눈치를 본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의 언동을 불편하게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의 관계도 크게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보란 듯이 안식일에 그를 고쳤다. 안식일 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유대교 권력자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예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전 청결 사건도 신학적인 문제다. 그것은 일종의 목회신학이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해서 당시 성전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은 가능한대로 성전을 활성화시키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지순례로 방문한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성전에 더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고, 수입도 늘어나면 좋은 거 아닌가. 이게 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1:17). 대제사장들이 성전(교회) 부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예수는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는 게 중요했다. 대제사장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행동과 발언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자는 살려둘 수 없었다.

 

예수는 안식일과 성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의 눈에 그렇게 비쳤을 뿐이다. 예수는 안식일이 생명을 살리는 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고,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뿐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신학적인 원칙이었다. 그 원칙마저도 이미 종교 이념에 기울어진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 예수가 한국교회에 와서 당시와 똑같은 조치를 취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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