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17)

새벽지기1 2017. 4. 3. 07:08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 17)


바울은 고전 3:16-17절에서 혁명적인 발언을 했다.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런 말을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들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최고급의 자재로 성전을 건축했다. 왕상 6장에 따르면 솔로몬은 성전을 칠 년에 걸쳐 지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렸다. 그 이전에는 여러 산당에서 제사가 가능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가 성직자 중심의 교권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증거다. 역사가 흐르면서 성전은 점점 더 강한 종교 이데올로기의 구심점이 되었다. 예수 당시에 그런 현상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에 얽힌 일화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온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요한복음이 제일 세밀하게 보도한다. 아마 이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요한에 의해서 가미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성지 순례 차 멀리서 온 사람들을 위한 편의점들이 있었다. 각 지역의 돈을 성전에서 통용되는 돈으로 환전해 주는 일, 흠이 없는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일이 그것이다. 예수는 마치 노점상을 강제로 철거하는 구청 직원처럼 그들을 내쫓았다. 공관복음은 그 순간에 예수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는 사 56:7절을 인용했다고 전한다. 요한복음은 약간 다르다. 예수의 행동을 보고 유대인들이 무슨 권위로 당신이 성전에서 행패를 부리느냐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요한복음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는 주석을 붙였다. 예수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입장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긴 하다.

 

바울은 성전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다.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덧붙여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했다. 이런 말이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좋다. 고린도교회에는 신앙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분파가 있었다. 고전 1:12절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나온다. 고전 3:4,5절에는 대표적으로 바울파과 아볼로파가 나온다.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이 심각했다. 바울은 이렇게 정리한다. 자기는 복음의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다. 자라게 한 이는 하나님이다. 고린도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들은 그런 역할만 할 뿐이지 교회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다. 고전 3:11절은 이렇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의 이런 해석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키운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키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앞에서 짚은 것처럼 서로 대립했다.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정당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이런 분쟁은 거룩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다는 게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무조건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한 것도 아니다. 교회의 토대, 신앙의 토대를 잘못 세우는 것이 바로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아볼로에 속했는지, 또는 바울에게 속했는지를 중요한 잣대로 여기는 태도는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이 문제를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칭의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의는 옳다는 것만이 아니라 거룩하다는 뜻도 포함된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곧 거룩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율법 실천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 믿어도 실제로는 의로워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고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얻는 의는 법적인 의미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지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 차원에서는 의로워졌지만 일상생활의 차원에서는 아직 아니다. 요약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길은 예수를 믿는 데서 주어진다.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영혼이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어찌 거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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