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15)

새벽지기1 2017. 3. 31. 08:46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7:40,41)

 

7장은 그 유명한 스데반의 설교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끝낸 후에 돌에 맞아 죽었다. 율법에 따르면 신성모독의 죄를 지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런 걸 결정하는 최고 법정은 산헤드린이다. 로마 실정법에 따르면 이것은 불법이었다. 산헤드린은 로마의 실정법을 공식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다. 스데반의 죄가 신성모독이라는 결정만 내리고 나머지는 군중들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그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의 책임 추궁을 피해갈 수 있다. 예수는 신성모독이라는 산헤드린이 선고를 받았지만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섰다. 스데반의 경우와 왜 달랐는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설명하지 않는다. 산헤드린의 더 야비한 음모가 작용했을 수도 있고, 스데반의 설교가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칠 수 없을 정도로 군중들의 심리가 폭발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스데반의 설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피의자의 마지막 진술과 같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유대교에 정통한 이들이다. 이들을 설득하려면 이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 스데반은 구약을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을 거론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와 아론, 다윗과 솔로몬이다. 나머지는 생략했다. 솔로몬을 거론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다. 산헤드린의 권위는 솔로몬이 처음에 건축했으나 바벨론과의 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가 다시 헤롯 대왕에 의해서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과 깊이 연루되었다. 스데반은 성전의 권위를 상대화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7:48). 스데반은 사 66:1절 이하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계시는 게 아니라 하늘과 땅을 비롯한 온 세상에 계시다고 했다. 그가 설교 처음부터 끝가지 줄기차게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이스라엘 당신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지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당신들 조상들의 행태와 똑같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떠났다. 이런 설교를 들은 산헤드린 의원들과 군중들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스데반이 거론한 사건 중의 하나는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그게 오늘 집중 묵상구절이다. 당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시내 산에 올라가서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조해졌다. 그럴만하다. 애굽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혹시 애굽보다 형편이 더 나쁜 것은 아닌지, 이러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거나 풍비박산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게 인간의 본심이다.

 

금송아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들의 마음은 이미 애굽으로 향했다고 한다(39). 이게 아이러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와 같이 살았던 애굽에서 영광의 탈출을 감행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몇몇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자 곧 마음이 흔들렸다. 그 이유는 가나안이라는 미래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최소한 생존이 보장된 애굽의 과거가 그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이게 인간의 본심이다.

 

그들은 결국 자기들이 만든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하면서 그것을 기뻐했다. 그럴만하다. 당시 그들은 유목민 신세였다. 애굽 문명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들은 해냈다. 모든 힘을 모아 애굽의 장인들도 만들기 어려웠던 금송아지를 만들어냈다. 스데반은 이렇게 언급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다고 말이다. 이게 우상숭배다. 그 대상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에 영혼을 빼앗기는 것이 우상숭배다. 국가도 우상이 될 수 있고, 가족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예술이나 목회도 그렇다. 스데반이 구체적으로 짚은 것처럼 교회 건물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다 낡고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하는 건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인생이 다 그렇지, 그것 말고 어디서 기쁨을 얻을 수 있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가 공생애 직전에 광야에서 기도하면서 마귀에게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을 생각해보라. 돌을 떡으로 만들라.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마귀에게 절하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기뻐하라는 요구다. 잠시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해주겠지만 아무 것도 남는 것은 없다. 예수는 그 유혹을 다 거절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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