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12)

새벽지기1 2017. 3. 27. 11: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2:14)

 

22장에는 한편으로는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믿음을 보였다는 것은 아름답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서 아들까지 죽여서 바치려고 했다는 것은 끔찍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우리가 이런 명령을 다시 받았다면 실제로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바쳐야 할까? 그게 가능할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인간이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명령까지 실제로 내리시는 분일까? 혹시 아브라함이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고대 근동에는 인신제사가 없지 않았다. 그들이 비인간적이어서 그런 일을 행한 것은 아니다. 극심한 가뭄이나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람을 신에게 바친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도 주변에서 그런 일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빠졌을 때 인신제사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약의 제사 행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생명을 바치는 의식이다. 사람을 바치는 대신에 짐승을 바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한 희생제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일을 하나님 당신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임으로써 인간 구원을 완성한 분이라는 말이 된다. 이게 말이 될까? 이런 하나님 상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적이다.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런 이교적 방식으로 밖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인가? 여기서 자칫 길을 잘못 들면 우리의 신앙은 고대 근동 종교에 익숙했던 인신제사 차원으로 떨어진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전승을 다시 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앞서 소돔성 사건 때는 의인 50명으로부터 시작해서 10명까지 내려오는 흥정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일절 말이 없다. 주인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종처럼 미션을 수행할 뿐이다. 이게 믿음의 최고 경지다. 말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럴 때 히 11:1절이 말하듯이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희망이 가능하다.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 이레!

 

모리아 전승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표다. 예수는 아브라함처럼 (또는 이삭처럼) 십자가 죽음 앞에 섰다. 모든 것을 잃는 순간이다.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예수는 말없이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였다. 인류 구원, 또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외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그 길을 갔다.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서 말이다. 여호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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