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14)

새벽지기1 2016. 9. 10. 07:54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직자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 믿음의 공동체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른다. 이처럼 어떤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은 그 말이 비롯된 문화와 떨어질 수 없다.
언어는 ‘뜻의 성례’로 표현될 수 있다. 성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를 외적이고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에서 약속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잘못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표시와 그것이 뜻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 숭배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문자화되기 때문이다. 화체설이 이것의 한 대표적인 예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표시와 그것이 뜻하는 것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김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받고 확신하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성례전의 관점에서 볼 때 언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면 성경의 말씀 자체를 예배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단지 듣거나 읽는 것 자체가, 비록 그 언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와는 달리,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면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전통은 성경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접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경 말씀은 성령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기록했고 그것을 읽거나 듣는 사람이 알 수 있게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말씀 자체를 숭배하지는 않는다. 복음의 말씀을 믿는 것은 외부적인 표시가 그것이 뜻하는 은혜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표시가 은혜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분석은 언어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말과 그것이 뜻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사람의 삶을 지나치게 경험적으로 접근하려는 위험 곧 실용주의에 이르기 쉽다. 이것은 의미를 일정한 형식으로 단순화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규정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시나 예술의 전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또 다른 한편, 이러한 전체주의적 풍조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사람은 의미와 언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의미라는 생각 자체가 파시즘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탈근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은 단지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고 아주 우연적인 경우에만 의미에 이르게 한다.


‘언어는 의미의 성례’라고 말하는 것은 이 두 극단 모두를 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갖고 있는 미묘성을 인정한다, 비록 그것이 산문이나 회화 혹은 시이든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은유, 직유, 풍유 및 빗대는 것과 같은 읽을거리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분리시켜 버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인식의 내용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언어가 하는 주된 기능이 무엇인가?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죄와 믿음을 고백하거나 찬양할 때 언어를 사용한다. 때로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언어를 사용하는 한 방식이다.  <계속>

  

출처...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