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13)

새벽지기1 2016. 9. 8. 09:54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결혼이 시작되는 방식이 무엇이든지 결혼은 부부를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그래서 결혼이 한 사회 제도로서 갖는 정당성이나 효용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공유적인 아이 양육의 장치를 찾거나 성적 관계의 주된 기준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은 결혼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수명이 늘어난 것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전 세기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게 진실하겠다고 다짐하는 약속은 평균 25년 정도였다. 이 기간은 한 세대의 아이들을 기르거나 세 번째 세대를 보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 약속은 50년이 넘도록 지속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경우 아이들과 함께 있는 기간보다 아이들 없이 지내는 기간이 더 많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많은 부부들은 아이를 기르는 기간 동안에도 자신의 사회적 경력을 중단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살아도 계속하여 독립적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어 가기를 바란다. 이러한 요인에 비추어 보면, 결혼한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산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이른바 금혼식 곧 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지속한 50년을 축하하는 것이 매우 드물 것 같다. 그것은 오늘날 어느 한 짝이 죽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결혼이 깨어진 것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화의 변화가 결혼 때 한 약속의 종류도 변화시키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은 결혼이란 10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작하는 동반자 관계라고 받아들인다. 오늘날 날로 늘어나는 이른바 ‘시험’ 결혼, 곧 사실상 동반자 관계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면서도 결혼이 깨어질 때 각자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계약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와 같은 이해는 결혼을 단지 두 개인 사이의 계약의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결혼 자체를 공동의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일부다처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기독교 사역자는 결혼에 대한 방침을 마련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아프리카의 어떤 전통에서는 배우자를 연달아 잇는 결혼 제도가 있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결혼 제도를 물리치는 것이 단순하고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이 결혼의 본질과 실제에 관한 문화적 다원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어떤 가능한 구조화된 남녀 관계도 문화적 상황에 달려 있다고 보는 상대주의적 접근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결혼의 규범 곧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평생토록 헌신하는 관계(마 19:3-12)라는 것을 지지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결혼이 어떻게 시작되고 결혼 생활을 어떻게 지속하며 결혼 관계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다.


교회 전통은 성실, 자유로운 헌신 및 다산 등을 정당한 결혼의 기준으로 마련하였고, 결혼식 때 주는 ‘예물’이 생식, 교제 및 성적 친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표시하는 것으로 의미를 규정하였다(엡 5:32).
이러한 모든 개념들은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이것들 가운데 기독교의 규범에 적합하거나 비판적인 것이 많을 수 있다.
가령, 전통적 교회 결혼식에서 신부와 신랑이 식장에 들어가는 방식이 어떤 뜻을 갖는가? 신부는 아버지의 팔에 손을 얹고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신랑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가? 결혼식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간의 부채를 지는 것이 기독교의 청지기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마땅한가?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