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15)

새벽지기1 2016. 9. 16. 09:15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언어를 통해 남에게 영감을 불어넣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며 이웃을 격려할 수 있는가 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미혹에 빠뜨릴 수 있고 남을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 말의 의미를 넘어갈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어떠한 문화에 있는지를 반영한다. 말에 강세를 주는 것이 그 말을 쓰는 상황과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어와 문화가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 국면 가운데 하나가 유머다. 유머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성이다. 왜 사람이 웃는지는 규명하기 쉽지 않다. 웃음의 본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여러 기능을 한다. 웃음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삶을 지속하게 한다. 이것은 특히 유대인의 유머 전통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사람이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 웃음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웃음이 다른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잔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파괴적인 웃음이 때로는 사람의 잘못을 경고하거나 잘못을 고치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가능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신문에서 실려 있는 시사만화를 들 수 있다. 눈에 띄는 시사만화는 어떤 사람의 위선을 드러내는데 값지게 활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남의 명예를 해칠 수도 있다.
문화의 모든 국면과 같이, 유머는 사람이 갖는 기쁨과 놀라움뿐만 아니라 죄가 일으킨 무서운 결과나 왜곡된 관계나 견해를 나타낸다.


그러면 유머는 죄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가? 유머는 시기, 욕심, 악, 허욕, 정욕 및 어리석음과 관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유머는 진리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인가? 하늘나라에는 웃음이 없는가? 잃어버린바 되었으나 회개한 사람은 웃음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아니면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 상태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웃음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성경에 유머가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유머에 빠질 수 없는 놀라움의 요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원어 이면에 있는 문화적인 규범을 잘 알지 못해서 많은 유머적 암시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사람들 대부분 번역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머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많지 않은데다가 대부분 부정적인 논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웃었다는 기록이다(창 17장 17절, 18장 12-15절). 이것은 본래 엉뚱한 일을 보고 웃은 것이고 두려움에서 비롯된 웃음이었으나 결국 기쁨의 웃음이 되었으니 아들의 이름을 ‘웃게 하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삭이라 지었다.


시편에는 웃음이 기록되어 있다(시 2장 4절). 하지만 그것은 의로운 자가 악한 자를 보고(시 52장 6절, 욥 22장 19절) 비웃는 것이거나(시 37장 13절), 적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비웃는 것이다(시 80편 6절). 시편은 한 번만 웃음을 긍정적인 뜻으로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 126편 1-2절). 


전도서는 ‘웃을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도(3장 4절), 웃음은 슬픔보다 못한(7장 3절) 미친 것(전 2장 2절)이고, 우매한 자의 어리석은 짓(전 7장 6절)이며, 잔치할 때의 냉소적인 희락(전 10장 19절)이라고 말하였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