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좋아야 오는 말이 좋다는 옛 말이 있다. 항상 말을 조심하라는 말이고 고운 말을 하라는 교훈일 것이다. 누구든 싫어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기에 항상 미소를 짓는 것은 좋다. 미소와 함께 친절한 말은 듣는 이와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든다.
성경 역시 좋은 말을 하고 욕설을 금하고 있다. 욕설은 아니지만 저주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경 신명기가 대표적인데 저주에 관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리새파에게 저주를 명하시곤 하셨다. 누구든 저주와 관련된 생각이나 말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성경은 왜 우리가 싫어하는 저주에 관해 자세히 또 반복하여 언급하는 것일까?
저주에 대표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인 여호수아 8장을 보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각각 저주와 복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심 산에 머물고 싶어 한다. 복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살피면 좀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6장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서의 대승을 거둔다. 이어서 조그만 아이 성의 공격에 실패한다. 그 이유가 아간이란 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이다. 그 범죄를 제거하고 난 후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공격하므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그런 후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서의 저주와 복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들여다보면, 제사를 드렸는데 에발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리심 산에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심을 말하고자 함이다. 여리고 성에서의 대승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이 성의 대승 역시 그분의 은혜다. 근데 아이 성에서의 대승 전, 참패를 당한 것은 우리의 잔꾀 때문이다. 결국 그 대가는 참혹하여 36명의 생명을 잃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저주였다. 그 저주를 누군가는 담당해야했고, 그 결과 누군가는 그 혜택을 받아야만 했다.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고, 우리는 그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희생으로 복을 누리게 되었다. 내가 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은 그분이 저주를 담당하신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그리심 산에 누구든지 서고 싶어 한다. 놀라운 은혜로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당연히 신자여야 한다는 식으로 교만해선 안된다. 당연히 복을 누리는 것이라 자랑해선 안된다.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여겨선 안된다. 반드시 그분의 저주를 받으심이 있음을 간과해서도 망각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배은망덕인 것이다.
나 스스로 태어나 자라진 못한다. 부모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행하는 법은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수행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불평이고 원망일 수 있지만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희생과 봉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때에만 타인에 대해 감사와 배려나 흘러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