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라은성목사

독립성과 자발성

새벽지기1 2016. 7. 21. 09:16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서 친구들과 사회에 독립적으로 적응하려는 시대를 10대 사춘기라 일컫는다. 조금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만 13세부터이다. 부모의 품에서만 지내다가 새로운 사회를 접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서운하면서도 대견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귀찮지만 부모 품에서 자라게 하고픈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을 선언하고픈 것이다. 부모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 . . 독립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결혼해서부터 시작한다고 봐야한다. 한 가정을 이룰 때 비로소 독립이란 말이 성립될 것이다.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을 이뤄 자녀를 낳고 키울 때 비로소 독립하는 셈이다.


독립인 동시에 자발성이 나타난다. 부모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하고픈데 간섭과 같은 조언을 들으면 귀찮아하는 시기가 10대 청소년 시기다. 자발성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자발성이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의지적으로 강한 자가 독립성을 가지며 자발성을 키워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독립성 또는 자발성은 추구하는 듯 싶지만 절대적인 의미로 실행하는 자는 거의 드물다 봐야 한다.


죄를 범하는 것이 자발적이라는 말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 나면 자신의 독립성을 저해하고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그분의 예정은 우리의 독립성과 자발성마저 포함하여 있다. 간섭 없는 것이 독립이고 자발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정하셨는데 어떻게 독립성이 있다는 것인가? 그분이 아시는데 어떻게 자발성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의 이성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히포스타시스(인격)을 지닌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거나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 예정과 자유, 즉 독립이나 자발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독립적으로 행한다. 누구의 간섭 없이 자발적으로 행하고 있다. 이것을 봐도 우리는 어느 하나에만 속해 행동하지만 둘 다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정을 인정하지만 자신은 자발적으로 행한다. 하나님의 간섭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동시에 그분을 의존한다.


자발성이라 할 때도 그렇다. 과연 완전한 자발적인 사람이 있을까? 누구의 또는 무엇의 동기부여가 없으면 행동할까? 아무런 동기부여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이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소금을 넣어야 가미되는 것처럼 자발적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 이것이 실제적 자발성이다. 그 적절성의 한계가 어디까지냐라는 것은 자신의 독립성에 따라 다르다. 독립성이 정한 한계에 따라 자발성이 달라진다.


신앙인들은 그 독립성을 주님의 말씀 안에 둔다. 행위의 동기도 그분의 말씀에 둔다. 진정한 독립과 자발을 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독립성과 자발성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이고 진리 안에 있고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고 진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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