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와 빌리 그래함의 부흥 이해(2) / 백주현목사

새벽지기1 2016. 5. 23. 16:12


3, 이들의 부흥에 대한 이해

로이드 존스의 이해

부흥이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는 1959년 부흥 - 그 역사적 및 신학적 연구에서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1)이라고 정의한다. 부연설명으로 "나른해지고 잠들어 거의 죽어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활기 있게 하고 깨워 소생하게 하는 것으로 갑자기 성령이 능력 있게 임하심이다, 그들은 이전에 그저 머리로만 믿던 진리를 새롭게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겸손해지고, 죄를 깨달으며 자신들의 상태를 보고 무서워한다. 그러면서 특징들이 나타나는데 첫째로 교회 지체들이 특이하게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게 되는 것, 둘째는 이제까지 교회 밖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한다는 것2)이다. 교회를 생동력 있게 변화시키면 교회 밖에 사람들을 이끌어 구원에 이르게 하며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부흥의 시대마다 흘러넘치는 생명력은 참된 기독교가 존재하는 곳 어디서든지 역시 나타난다. 부흥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부어지는”역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의 시대는 하나님의 보다 정상적인 사역을 수반하는 것들과 본질에 있어서 다른 결과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 동안 나타나는 신적 은혜의 수많은 경우들은 특이하고 예외적이고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래서 부흥을 인간의 노력으로 산출할 수 있다거나 조장해 낼 수 있다는 식으로 보는 관점을 그는 오류이고 회심의 의미 자체에 대한 거짓된 관점에서 나온 것3)이라고 이해한다.


성령세례라는 책에서 교회 역사를 부흥의 역사라고 말하며 교회가 무기력해졌을 때 하나님은 갑자기 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으시며 그를 일으켜 세워 그의 설교를 변화시킨다4)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성령의 부어주심이 부흥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설교사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오순절 날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탄생, 기적 십자가에서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승천과 같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매주일 상기하게 된다. 오늘 날 이것이 그 어느 때 보다 강조될 필요가 있음5)을 필역하다.


그는 이 부흥은 교회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부흥이 없었다면 교회는 수세기 전에 죽어서 끝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한다. 교회나 모임전체 ,혹은 여러 교회나 나라 전체에 동시에 성령을 부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 행하신 것을 다시 행하신 것입니다. 생명이 가려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다시 보내셨고 능력이 사라지자 다시 그것을 보내셨던 것입니다.6)


그는 부흥을 오순절 날에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다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적인 노력과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해서 내려주시는 은혜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성령세례라는 책에서도 부흥은 교회 회원이 놀랍게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  성령의 부어주심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에는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지고 드러나는 성령의 체험7)들로 보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그가 주장하는 성령세례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듯하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이해하는 면에서 성령의 부으심과 생명력이 나타남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교회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시대에 나타나는 것이고 특별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의 조직이나 꾀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그래서 교회의 큰 날들과 보통 날들을 가진다고 보았다. 큰 체험과 일상적인 체험도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부흥은 특별한 어떤 것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부흥에 있어서 사람들을 회심케하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는 회심케하기 위하여 진리를 사용하시고 특히 설교를 통해서 그러한 일을 탁월하게 행하신다.8) 로이드 존스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부각시키고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의 이해

그런데 비해서 빌리 그래함은 1934년 부흥 집회에서 회심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그는 밥 존스 신학대학(침례교 계통)에 입학하여 1939년 남침례교단의 목사가 된다. 그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 영향으로 부흥집회를 많이 열고 그 집회를 통해서 결단의 시간들을 부각하여 회심과 회개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보다는 인간의 전적인 결단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례교에서 결단의 시간이 중요한 것으로 집회마다 그것을 요구하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침례교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가 전도 집회를 다니는 곳마다 “빌리 그레이엄 캠페인을 열었고 그는 또한 세계를 두루 다니며 설교했지만 언제나 결단의 시간과 그것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는 집회 시간마다 결단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결단의 시간이라는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과 결단의 시간이라 불리는 라디오와 TV방송국을 설립했다.9)이 매스컴을 통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매스컴을 통한 캠페인과 결단의 시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인위적인 방법을 찾고 그것을 사용했다. 이러한 매스컴의 역할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매스컴의 문제를 지적하며 “ 매스컴의 마술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근시안적인 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바로 우리의 ‘복음’자체를 하나님 중심보다는 상업중심적인 것으로 바꿔 버린 데에 있다. 인간 중심주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미니안주의나 과거의 계몽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적인 유산이다.10) 빌리 그래함은 좋은 의도로 시작한 매스컴의 활동이 점점 퇴락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비해 로이드 존스는 방송을 사절한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 할 수 있다는 요소 때문이다.


자신이 체험한 그 부흥이 이들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고 목회에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그러한 부흥을 교회사 속에서 연구를 통해서 참된 부흥을 찾으려 했고 정립해 나간 듯하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임재와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인위적으로 보이는 결단의 시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필역한다.


로이드 존스는 칼 헨리와의 인터뷰에서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 방식에 대하여 회의 적인 반응을 보인다.

질문 : 제가 기억하기로 , 박사님과 저는 1966년 장차 있을 (빌리 그레이엄) 베를린 세계 복음전도대회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만났습니다만, 당시 박사님은 이 대회의 참가자나 업저버가 되기를 사양하셨지요. 또한 박사님은 런던의 큰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아마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협력하지 않은 유일한 목사였지요? 그러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답 : 사실 그것은 저에게 매우 중차대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평소 부흥 외에 어떤 것도 교회와 세계의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어왔습니다. 부흥이란 성령이 찾아오시는 사건으로서 복음전도캠페인과는 다른 것이죠. 웨일즈 장로교회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대 부흥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대 부흥 당시 하나님의 권능이 설교자들과 교회들에 강하게 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조직화된 전도운동에 대해 탐탁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1820년대에, 특별히 미국에서 에이저헬네틀튼(Azahel Nettleton)의 부흥운동으로부터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미묘하고 불행한 변화가 발생했습니다.부흥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좋지 않게 진행되고 있을 때, 옛날의 접근법은 목회자들과 집사들이 금식과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대안은 복음전도 캠페인입니다. 목사들은 “우리가 누구를 전도자로 세울 수 있을까? 라고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둘 옛 학파에 속 해있습니다.


질문 : 목사님은 현대의 복음전도운동 그 자체에 대해 특별히 어떤 점들을 염려하고 계시는가요?

대답 :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직화된 캠페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신하고 싶은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빌리 그레이엄이 지극히 정직하고 신실하며 순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1963년에 저에게 제1차(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의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회는 베를린이 아닌 로마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집회였습니다. 저는 그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가 전도대회를 위해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후원받는 것을 중단하고, 결신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는 초청제도를 없앤다면, 저도 마음을 다해 그를 후원하고 집회의 회장직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 세 시간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였습니다만 결국 그는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대회나 캠페인이 실제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저의 견해를 실증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지난 20년 내지 25년 동안 해온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적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악화되지 않았습니까? 교회와 목회자들이 무릎을 꿇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길 외에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조직하는 일에 매달리는 한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에게 임하여 자신들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캠페인식 접근법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권능보다 기교를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은 확실히 복음을 설교합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결코 그를 비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비평했던 점은, 일례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글래스고우 전도대회 때에 그레이엄은 존 서덜랜드 보넬 (John Suther-landBonnell)로 하여금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죠. 그레이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복음주의 목사님들보다 존 서덜랜드 보넬과 오히려 더 많은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마도 보넬이 로이드 존스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겠죠. 이 점을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교제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은 나와 동일한 기본 진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11)


여기서 보다시피 그는 부흥에 대한 이해에서 빌리 그래함과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뿌리를 찰스 피니적인데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집회나 결단이라는 것에 대하여 철저히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두 사람은 성경적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렇게 설교하려고 애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부흥이라는 면에서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로이드 존슨의 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찰스 피니적인 부흥이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적인 견해를 필역하고 따라 가게 된다면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조금은 지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따라 부흥을 이해한다면 어떨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