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는, 죄가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6:12-14)
12절 이하의 대목은 처음 열 한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이 논술하였던 주장을 실천적인 방면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실제적인 교훈을 일반적으로 진술하고 13절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진술한다.
14절은 그동안의 위대한 원리들을 실천하게 용기를 북돋고 자극하는 하나의 위대한 원천이다.
바울서신에서 “그러므로”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1) 교리는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더 큰 부류가 교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실제적인 문제에만 열을 올린다.
보다 작은 한 그룹은 교리에만 관심을 가지고 실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란 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1-11절에서 개진한 교리들에 관심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두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경고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13:17).
그 모든 지식과 교리가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과 윤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심판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13장).
2) 실천적인 대목은 이전 교리적인 대목을 바로 이해하였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반드시 서로 상통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게 한다.
너희와 너희 죽을 몸, 분명히 이 둘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바울이 죄로 너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하고 있다. 죄의 몸은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죄를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 육신적인 몸이다. 그것은 죄짓기 쉬운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저 위대한 칼빈마저 죄있는 본성으로 해석한다. 우리의 인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 육신, 뼈와 피를 의미한다.
죽어가고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라는 자신은 구원 받았다. 죄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사도는 우리의 장차 영화될 몸과 죽을 몸을 대조시키고 있다(빌3:20).
우리 자신은 이미 죄의 영역과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다. 죄는 오직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몸이 영화롭게 되고 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토록 없어질 날이 온다.
그의 모든 호소는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거나 통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그리스도들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는 것은 가능하다.
원리로서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① 죄가 아직도 우리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가 아니고 우리 몸에 이다.
② 죄가 다만 우리 몸에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할려고 기를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죄는 본능을 사욕으로 바꾼다.
자연적인 본능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죄는 자연적인 본능들을 비정상적인 정욕과 사욕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제지하여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우리 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롬6:19, 7:18, 20, 23, 24, 8:23, 12:1, 고전6;13).
4)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 교리로 우리들을 안내해 준다.
제1의 원리는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하는 무슨 일이라는 것이다.
권면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성화란 위로부터 받아지는 선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실수를 범한다.
제2원리는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로부터 영단번에 완전히 구출되어 갑작스런 체험같은 일이 있다는 생각을 제거해야만 한다.
또한 분명한 것은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 방식은 포기하라고 호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친숙한 교훈이다. ‘기꺼히 포기하라’고 배워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또한,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은 반드시 주님을 바라보라는 호소만으로라든지,
“그로 하여금 내 안에서 그의 생명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호소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의 고통은 죄와 싸우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론 당신은 패배한다.
거기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포기할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그로 하여금
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도록 하라. 그분은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당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려움을 더 이상 겪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백여년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단에서 일반화되고 편만된 가르침이 아니었는가?
제가 묻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과 이 “죄로 너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
그것은 우리를 향하여 주신 권면이요, 적극적인 의지의 행동을 요청하는 부름이다.
이 다른 교훈이 비성경적인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실로 그것은 많은 성경적인 교훈을 무시한다.
그것은 신약의 후반부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투쟁을 멈추고
주님으로 하여금 그의 승리하는 삶을 우리 가운데 살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실제적인 권면을 받게 된다.
서신서에서마다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도적질하지 말라.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도 이 다른 교훈은 그 모든 것을 빠뜨리고는,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으로 하여금 네 안에서 살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12절의 권면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앞에 나온 열한 절의 말씀들 가운데서 정교화시킨 교리 때문에 틀림이 없다.
어떤 이는 “그러나 당신이 앞의 구절들에서 말한 것과 이 모든 것과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당신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의 권능 아래 있지 않으니
우리의 성화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 하실 거라고 우리를 설득하였다.
그것을 강조하여 놓고, 이제 당신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라고 묻는다.
조화시키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 일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빌2:12-13을 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방식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를 바라보는 것’이나
‘하나님께 하라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만을 하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12절에서 가르쳐지는 방식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신약의 성화 방식이다.
성화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성화는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아 교리로부터 추론들을 끌어냄에 따라 이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이 ‘그러므로’란 말에 필요한 관심을 두어야 하고, 어떤 추론을 이끌어야 하며,
어떤 것들이 이미 설정된 교리의 결과로 필연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들을 아주 실제적인 세목들로 인도하여 준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 있는 죄를 이기기를 갈망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첫째로 교리를 이해하라. 교리에 분명치 못하면 ‘그러므로’로 나아갈 수 없다.
1-11절의 말씀을 이해했는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 죄에 거할 수 없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이해했는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은 것과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 대하여 죽은 줄로 여기라”는 뜻을 알겠는가?
교리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출발점이다.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내 안에서 살도록 하면 그 뿐이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교리를 이해한 뒤에도 그 교리를 부단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라’- 끊임없이 그런 것으로 간주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라.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인 추론들을 끌어내라.
“이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것에 비추어서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교리는 우리들에게 성결에 대한 참된 동기들을 제공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해서는 안 되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마귀의 역사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완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그의 모든 목적은 나를 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알고 깨닫는다.
그러므로 나는 죄로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죄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동기들은 그러하다.
이것이 내가 성화하는 방식이다.
죄로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혀용하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 추론은, 바로 하나님의 명예,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구주와 내가 속한 하늘의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식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거룩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며,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가정의 모든 명예가 달려 있는가를
말해주는 진리이다. 그 진리를 이치를 따져보고 행할 것을 알라고 한다.
진리는 나로 하여금 내가 처한 놀라운 지위를 부단히 생각하게 한다.
죄와 죽음이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
내가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들을 깨달을 때이다.
또한 내가 죄가 내 몸에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영화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완전히 모순이다.
또한 죄의 왕노릇을 허용한다면, 나는 하나님과 나와 내 구원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스스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이 목적을 하나님은 이루어가고 계신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으며 아무것도 그 은혜의 왕노릇을 전복시킬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죄의 왕노릇을 허락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격이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고린도 교회에는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 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그는 이 목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한다면
우리가 매맞고 징계당한다 하여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어 어리석고 더 야비한 짓이 어디 있는가?
마지막 추론은 권면에 앞서 있었던 교리에 비추어 볼 때,
그 권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또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나게 한다.
자연인에게 “죄를 정복하시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쓸데 없는 일이 없을 줄 안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여러분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 안에 능력을 얻었으며,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교리는 이미 여러분에게 “세상에 있는 자보다 너희 안에 있는 자가 더 크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핑계도 댈 수가 없다.
여러분은 홀로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여러분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포기하고 하나님께서만 행하도록 하라”는 말만을 듣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는 수동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도록 하라고만 말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대신 “그러므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여러분은 죄의 왕노릇을 멈추게 할 위치에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피하리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라”(벧전5:8,9)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를 정복하고 물리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로서는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소원을 두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할 힘을 주셨다.
여기서 성화에 대한 서론을 대하게 된다.
그 서론이 사활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그러므로’란 말에 의하여 소개되고 있다.
1-11절의 영광스러운 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러므로 죄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한다.
- 로마서강해 3권 12장 ‘신약의 성결 교훈방식’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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