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671

한국교회의 위기? / 임용민 목사(새소망교회)

주님께서 신약 교회에 행하라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회복키 위해 직무와 은사를 회복해야 코로나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언론들은 교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가 6%라고 소리 높여 오피셜했다. 대부분 교회는 전도가 안 된다고 한탄한 지 이미 오래고, 이와 무관하지 않게 주일학교가 축소되고, 중고등부, 청년대학부가 거의 사멸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교회는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이 없는 위기에 처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을 한 순간도 잃은 적 없다. 지금도 무적의 왕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앉으사 대권을 행사하신다. 대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

회상(回想)과 회복(回復)/ 김수환 목사 (새사람교회)

실상을 직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전보다 더 큰 영광으로 회복시키실 것 인류 역사와 문명은 과연 발전하는가? 언뜻 보면 그래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마치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어떤 상인들의 말처럼, 현대문명과 역사발전의 이면에는 또 다른 부정적이고 퇴행적인 면이 숨어 있다. 선한 목적을 갖고 노력한다고 반드시 선한 결과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우리의 문명과 역사가 저절로 향상되고 발전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합신의 나이가 벌써 40이 되었다. 사람의 나이가 40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세대여야 한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40년이 지났을 때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

복음의 공공성과 하나님나라 신학 / 강경민 목사(평화통일연대 상임대표)

복음의 공공성은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가 함께 작동한다 합신교단은 오직 개혁을 위해 탄생했다. 합신이 지향하는 개혁은 교회 개혁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포괄한다.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의 지향성이요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신의 개혁성은 일방적으로 교회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교회의 타락이 선을 넘었다는 판단 때문에 교회 분열이라는 비판과 아픔을 안고 시작했으니 출범 초기 교회 개혁에 초점을 맞춰 질주했던 것은 어쩌면 역사적 한계였을 것이다. 과연 교회 개혁에 대해서는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다. 합신 교단 소속 교회들이 사회적으로 도덕적 비판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던 총회장 선거가 얼룩진 돈 선거로부터 투명했다는..

그리스도의 신앙과 진실의 길로 / 윤여성 목사(열린문교회, 본보 논설위원)

한국 교회 속에서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특수적 배경과 이념의 구별됨을 포기할 수 없다 합신총회 40주년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온 교단이 현장에 함께 모여 축하하는 자리는 어렵거니와 마음의 하나 됨 속에서 이런 지면으로 성의(聖意)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믿는다. 성경에도 동일하게 다윗 성역 40년을 마칠 무렵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에서 보인 것에 대해 무언가 배울 점이 없는지 생각했다. 지금 교단 상황이 그날의 교훈에 비춰 합당히 행해야 할 것은 없을까? 당시 위세 등등한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아비아달과 함께 모의, 왕 됨을 선언하였으나 솔로몬과 그를 돕는 자들이 동참하지 않았기에 결국은 이스라엘의 향..

고난은 악(惡)이 아니라 약(藥)이다 / 조봉희 목사(지구촌교회)

고난을 염세적인 악으로 여기지 말고, 섭리적인 약으로 여기며 살아가자 일본 재계의 신으로까지 불렸던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어린 시절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 ‘때문에’라고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 ‘덕분에’ 평생 근검절약할 줄 알아 부자가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때문에’라고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우지 못한 ‘덕분에’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에 관심 갖고,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온 열정을 쏟았다. 말년에는 ‘마쓰시타 정경숙’이라는 배움터까지 세웠다. 그리고 그는 몸도 약했다. 하지만 약함 ‘때문에’라고 핑계 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약했던 ‘덕분에’ 더 조심하고 삼가면서 건강을 챙겨 95세가 넘도록 장수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 개혁교회의 율법과 언약 이해 / 이남규 교수(합신, 조직신학, 시은교회 협동목사)

첫 행위 언약으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아담 안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능동적 순종은 별개로 분리할 수 없으며 단일 순종으로 말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율법과 언약 이해는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본래 우리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께 먼저 축복과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1).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자연적 복속이라 불렀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히 낮아지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에 대한 순종에 축복과 보상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2). 개혁신학자들은 이것을 언약적 복속이라 불렀다.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에 있는 인..

‘교회’ 정의에 대한 이해가 언약적 삶에 미치는 영향 / 이차식 목사(율곡숲교회)

개혁교회는 참교회와 거짓교회 둘 밖에 없다고 간주하고 중간의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언약적 삶을 중시하며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열매로 가시성을 항상 검증해야 한다 초기 개혁신앙고백서들의 교회에 대한 정의 벨직신앙고백서는 교회를 정의할 때 니케아신경이 진술하는 어휘를 사용한다. “우리는 한 보편적, 또는 우주적인 교회를 믿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교회는 우주적인 한 교회이다. 니케아신경은(325년)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기술한다. 교회는 그때부터 하나의 교회를 고수해 왔다. 벨직신앙고백서 제27항, 제28항에 의하면 공교회는 하나다(마 16:18, 19; 행 2:47; 갈 4:26; 엡 5:25-27; 히 2:11, 12; 12:23). 화란에서 이 문제로 ..

우리 함께 올바르게 되자 / 변세권 목사(온유한교회, 본보 논설위원)

교회로서의 본질과 가치를 향유, 발현하며 함께 올바르게 가려면 건전한 비판도 필요하다 ‘목사는 진심을 말할 때가 아니라, 책임을 행할 때만이 훌륭해진다.’ 달력으로는 가을이 되었는데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하다. 일부 교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한 정국에서 목사의 신분으로 교인들을 이끌고 애국운동을 한다고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고, 그로 인하여 전염병이 확산되는데 통로 역할을 했다고 계속 비판 받고 전체 교회가 그 부담을 함께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독자들과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떠나 우리 목회자들은 교회 이름을 달고 이런 집회에 참여하면 안 된다. 목회자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목회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복음전파에 결과적으..

장점을 살리는 리더가 요구된다 / 박형용 목사(합신 명예교수)

효과적인 리더는 시간을 내서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 파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바라보거나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리더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임을 알 수 있다. 한 기관이나 조직은 그 기관을 이끄는 리더가 어떤 리더냐에 따라 효율적이고 화기애애한 기관이 될 수도 있고 매일 사역자들을 긴장과 초조감 속에 몰아넣는 기관이 될 수도 있다. 이는 한 국가도 그렇고 작은 기관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생각하면 목사들과 복음 사역자들은 모두 리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장점을 살리는 좋은 리더가 되는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리더들은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리더는 자신이 그 기관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의식을..

축도에서 목사는 왜 손을 들어 올릴까? / 노승수 목사 (가족성장연구소)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한다 우리가 매주일 만나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다. 축도에서 항상 목사는 손을 들어서 축도를 행한다. 이 시간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드린다. 기도라면 굳이 손을 들 필요가 있을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고 보이기 위함이니 당연히 축도 시에는 눈을 뜨고 목사의 들린 손을 바라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에는 낯설다는 것을 안다. 같은 이유로 사도신경 역시 기도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며 눈을 뜨고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축도 후 폐회를 알리는 송영의 찬송을 드리는 동안에 그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 축도에서 왜 눈을 뜨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