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행복에 대한 여덟 가지 오해 / 정병선목사

새벽지기1 2023. 10. 25. 07:07

인간의 앎에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습니다. 완전한 앎은 불가능하고, 완전한 거짓은 뿌리내리기 어렵기에 일리(一理)가 진실을 가리는 일이 많고, 또 일리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진실이 아닌 것도 많습니다. 행복에 대한 앎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오해가 행복을 왜곡하고 있고, 행복에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지 찬찬히 살펴볼까요?

 

행복은 가진 자들의 자기만족이다

 

첫째로 행복은 가진 자들의 자기만족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감정적 자기도취라고 생각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촌을 보면 지진을 비롯해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전쟁과 살상과 신음이 그치지 않는데, 그런 지구촌에 살면서 어떻게 행복을 노래할 수 있으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리(一理)가 있습니다. 지구촌의 살림살이를 보면 정말 탄식과 한숨과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행복 또한 매우 역설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구촌의 모든 재앙과 고통을 면제받거나 지구촌의 아픈 현실을 외면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참 묘하게도 지구촌의 모든 재앙과 고통을 면제받거나 지구촌의 아픈 현실을 외면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오히려 지구촌의 아픈 현실 속에 숨어있고, 지구촌의 찢긴 현실에 참여하는 곳에 임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지구촌의 아픔을 면제받거나 외면하는 자들이 누리는 왜곡된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행복은 함께 울고 아파하는 마음속에 임하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둘째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물론 이 오해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안으로 굽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자칫 이기적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또 자기만의 행복에 갇히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주의와는 다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자신을 위하는 것과 타인을 위하는 것의 관계에 대해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하고 탐구한 것만이 훗날 타인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타인을 위해서라고 정해진 것은 타인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주변을 보세요. 지역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며 공직 선거에 출마한 자들일수록 뒤에서는 권력에 줄서고 잇속 챙기기에 재빠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백성들을 독재와 테러범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하겠다며 정의의 칼을 빼든 미국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세계의 젊은이들을 죽인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평생 씻을 수 없는 가난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겨준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1980년 광주에서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군인들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찢기고 희생당하지 않았습니까? 세계 역사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정치 군사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나폴레옹의 삶도 그렇더군요. 그가 성취한 정치적 변혁은 상황에 따라 금세 뒤집힌 반면, 수많은 전투에서 적군과 아군을 죽인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그의 삶이 실은 사람 죽인 것에 불과했습니다(프랑스 인구의 1/6쯤 되는 50만 명이 생명을 잃었음). 비록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였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유럽 대륙에 전파해서 무자비한 봉건주의 제도에서 해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면에서 평가할 대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로 인해 치러야 했던 전쟁의 상흔은 너무 처참하고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일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위한다면서 자녀의 목을 옥죄고 틀 안에 구속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반대로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색하고 탐구한 것이 먼 훗날 타인의 이익이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의 숲속으로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소박하게 생활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소한의 것을 소비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남는 시간은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삶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방문객들과 대화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일기를 비롯해 1854년에 출판한 “월든”이라는 산문은 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월든”이 그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세기에 출판된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로우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개인적인 삶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소통의 삶이 되었습니다.

 

배움도 그렇습니다. 옛 사람들의 배움은 철저하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습니다. 학문의 제일 목적이 자기 수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학문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대한 고전으로, 인류의 고귀한 유산으로 상속되어 많은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 사람들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합니다.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 공부합니다. 그러다보니 학문이 얕아서 남에게 줄 것이 없는 공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중국의 유가(儒家)에서 이단아로 낙인이 찍힌 두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을 주장한 묵적, ‘위아(爲我)’ -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양주입니다. 흔히 양주의 사상을 이기주의라고 힐난하는데 <여씨춘추>라는 책을 보면 ‘위아’를 설명하기를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爲我)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경중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동양철학자 김시천은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에서 양주의 사상을 나의 생명 이외의 것들은 나의 삶을 기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명예, 재산, 성공, 그 어떤 것이라도 삶을 능가하는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양주의 ‘위아’ 사상을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삶 중심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며 양주를 변명했습니다.

 

옳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피상적으로 보면 천박한 이기주의처럼 생각될 수 있겠으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我)를 잃지 않고 삶의 중심성을 잃지 않겠다는 결기(決起)요 삶 외의 그 무엇에도 삶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철한 ‘삶 중심주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주의 ‘위아’ 사상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타인을 위한다고 하는 일들은 대부분 타인을 죽이기 일쑤이고,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는 길이 된다.”는 것은 정말 삶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은 고통과 근심이 없는 상태이다

 

셋째 오해가 있습니다. ‘행복’은 고통 ․ 근심 ․ 두려움이 없는 상태, 즉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물론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진실도 아닙니다. 만일 행복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누가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겠지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는 누구라도 고통 ․ 근심 ․ 두려움 ․ 슬픔 ․ 공포와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이건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물론 고통 ․ 근심 ․ 두려움 ․ 슬픔 ․ 공포를 초월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논하는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행복이지 ‘그러므로’의 행복이거나 ‘…하면’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의 행복이나 ‘…하면’의 행복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다 같다

 

넷째로 생각할 것은 행복의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행복에 대한 느낌은 거기서 거기라는 오해입니다. 이것은 일리도 없는 전적인 오해입니다. 행복에도 천차만별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본능에 가까운 생리적 욕구로부터 안전의 욕구, 사회적인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소리, 존재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까지 인간의 욕구는 다차원적이라고 했습니다. 앎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자료(Data)⇒정보(Information)⇒지식(Knowledge)⇒지혜(Wisdom)의 오름차순으로 말이지요. 때문에 안다고 해서 다 같은 앎인 줄 알면 큰일 납니다. ‘지식’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물과 사실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취득이라면, ‘지혜’는 지식의 차원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깊이까지도 헤아릴 줄 아는 것이니까요.

 

행복도 4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각적 행복. 새 차를 구입하거나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내 집을 마련했을 때, 주린 배를 맛있는 음식으로 채웠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조건이 채워짐으로 인해 느끼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회적 행복. 꿈을 이루거나 성공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취를 했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권투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때, 축구선수가 월드컵 대회에서 승리했을 때, 수험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느끼는 행복이지요. 셋째로 감성적 행복. 아름다운 음악 · 그림 · 글 · 연극 · 영화를 감상할 때 느끼는 심미적 행복입니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 맑고 깨끗한 호수를 걸을 때 느끼는 행복이지요. 넷째로 전인적 행복. 외부의 상황이나 조건에 부침이 없는 내적인 평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영적인 평화의 상태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부분적인 행복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통합되고 삶과 존재가 하나가 되는데서 오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질과 깊이도 각각 다릅니다. ‘감각적 행복’은 짜릿한 쾌감과 희열의 극치에 쉽게 도달하는 대신 시간이 매우 짧고 제한적입니다. 외부 의존적이고 조건적입니다. 쉽게 깨집니다.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매력적인 이성과 관계를 할 때에는 최상의 짜릿한 희열을 느끼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눈 녹듯 사라져 버립니다. ‘사회적 행복’은 감각적 행복 못지않은 짜릿한 쾌감과 희열이 있습니다. 조건적이고 외부 의존적이며 쉬 깨진다는 면에서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감각적 행복보다는 시간적으로나 질적으로 깊이가 있고 오래 유지됩니다. ‘감성적 행복’은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만 준비되고 열려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수 있습니다. 한 잔의 물을 마시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북적이는 지하철 속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정갈한 마음, 번득이는 영혼, 예민한 감각,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과 맑은 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외부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감성적 행복입니다. ‘전인적 행복’은 감각적 행복과는 다르게 짜릿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물과 같이 덤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묵은 간장처럼 깊은 맛이 납니다. 순간적이거나 변화무쌍하지 않습니다.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 영역에 걸쳐 행복감을 느낍니다. 행복이 잠시 멈추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지만 이내 곧 회복됩니다. 전인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내면적입니다. 또 조건적이지도 않습니다. 삶의 다양한 영역이 두루 통합되어 있고, 삶과 존재가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험한 세파에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로 유명한 토마스 머튼의 고백을 들어보면 전인적 행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홀로 있음’이라는 소명을 발견할 후, 내 생애 처음으로 너무나 완전하고 심원하여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맛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가 행복했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 행복은 진짜였고 항구적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의 저 심층까지, 모든 마음의 풍랑, 모든 두려움, 가장 깊은 어둠 속까지 파고들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에 있었다.”(기도의 사람 토마스 머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4:4)는 예수님의 말씀도 생리적 욕구를 채움으로써 얻는 행복과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얻는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다섯째 오해는 요즘 언론이나 책에서 많이 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이지요. 몇 가지 심리적 기술(Skill)이나 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쉽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뇌 속에 있는 행복 단추만 누르면 금방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행복에는 외부적 요인도 작용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부적 요인이 좌우하기 때문에 마음먹기가 매우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 마음먹기란 매우 쉽기도 합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 뜻대로 하기 어려워도 내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마음먹기가 마음만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마음먹기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또한 마음먹기입니다. 사람들이 밤새워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불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도 사실은 마음먹기가 마음만큼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삶이란 몇 가지 심리적 기술과 방법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없이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며 신비한 것이 삶이고 사람입니다. 평생 인간의 정신을 연구한 심리학자 융은 죽기 전에 이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정신이 저마다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 가를 알아낸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경험 중의 하나였다.” 옳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라는 게 언뜻 보면 그만그만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제각각 다릅니다. 아무리 벗기고 벗겨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정신세계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이 한없이 힘들지만 동시에 재미있는 것도 인간의 내면세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면세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날마다 새롭게 기대하고 탐구하며 호기심이 바닥나지 않는 흥미진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때문에 몇 가지 기술이나 방법을 터득하는 것으로 행복을 건져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과 인생의 신비와 오묘함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집을 찾듯이 행복을 찾는다.” 볼테르의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사람뿐 아니라 그때 사람들도 쉽게 행복을 찾으려고 덤볐나 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고질병입니다. 세월이 가도 영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땅엣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즉 위엣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엣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는데,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는데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냐는 거지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에 불과한 것으로서 죄라는 겁니다. 주님께 면목 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매우 신앙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단견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만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우리도 주님을 따라 고난을 당하라고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모든 형태의 저주와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매임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고난 - 진리를 따름으로 인해 져야 하는 고난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더 이상 행복을 파괴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행복을 노래하는 고난이요, 고난 가운데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한 고난이지 행복을 일그러뜨리는 고난이 아닙니다. 또 행복이 과연 땅엣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 희락 ․ 화평 ․ 오래 참음 ‧ 자비 ‧ 양선 ‧ 충성 ‧ 온유 ‧ 절제는 행복한 삶의 필수요소들입니다. 행복한 삶은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삶으로서 결코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성령에 속한 것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일곱째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특히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 행복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다가 고난도 달게 받아야 그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이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죄송한 일이라고요. 옳습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의 본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다음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만 말하는 것은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겠습니까? 아니, 조금 바꿔서 물어봅시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까요? 그건 두 말할 필요가 없습지요.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 생명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입니다.

 

행복은 삶의 결과이지 목적이 될 수 없

 

여덟째로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생각은 매우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어린 강아지가 어미 개에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친구랑 꼬리잡기 내기했어. 친구 말이 내가 내 꼬리를 잡으면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대. 근데 절대 못 잡는대. 그래서 나는 잡을 수 있다고 큰 소리 쳤지. 그런데 하루 종일 뱅뱅 돌아도 절대로 잡히지 않아. 엄마, 나 평생 행복을 못 얻으면 어떡하지? 나는 왜 내 꼬리 하나 마음대로 못 잡을까?” 그러자 어미 개는 웃으면서 설명해주었다지요. “얘야, 행복은 네 꼬리와 같단다. 그냥 걸어가면 평생 너를 따라다니는 거야. 무엇 때문에 힘들게 잡으려 하니? 그냥 잊어버리렴.”

짐작하시겠지만 이 이야기는 꼬리를 잡겠다는 강아지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행복을 붙잡겠다는 인간의 모든 수고도 헛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복은 결과로써 따라오는 것이지 목표로써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행복을 추구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고, 그리하면 모든 행복을 줄 것이라고(마6:33-34) 했지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행복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다보면 행복 욕구에 사로잡히기 쉽고, 행복 욕구에 사로잡히게 되면 건강한 행복, 참 행복이 아니라 왜곡된 행복, 사이비 행복, 자신만의 행복에 빠져들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런 위험성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나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율례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신10:13, 렘29:11). 이사야가 메시아 시대의 세계상을 묘사하면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세계라고(사11:6-7) 한 것도 사랑과 평화의 삶이야말로 메시아 시대의 세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벌인 것도 잔치였습니다. 죽은 아들이 살아왔다며 살진 소를 잡고 비단 옷을 입혀가며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것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요2:1-11). 그리고 성경에서 잔치는 언제나 하나님나라의 비유적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신학자 토니 캠폴로는 하나님나라를 ‘파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구원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결과이고, 또 구원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의 다른 표현인 행복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나라가 행복의 세계라고 해서 행복한 삶이 곧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행복한 삶 이상이기 때문에 단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삶의 양식으로서의 행복이라면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인생의 목적으로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행복에 대한 여덟 가지 오해를 살펴보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향해 달려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오해가 또 있습니다. 돈과 행복의 진실, 성공과 행복의 진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그 문제를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