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돈과 행복의 진실

새벽지기1 2023. 10. 27. 07:12

돈은 생활의 밥이요 숨입니다. 돈은 누가 뭐라 해도 가장 현실적인 관심사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형제간의 다툼이나 부부의 이혼, 오랜 친구의 배신, 강도와 살인 같은 끔찍한 범죄도 돈 때문인 경우가 많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가족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윤을 위한 기관도 아니고 돈으로 돌아가는 기관도 아니지만, 그런 교회조차도 돈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가지 악의 뿌리’라고 설교하는 성직자도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깨에 힘이 빠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는 “돈 문제가 아무리 치명적인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우겨도, 살다보면 그로 인해 삶이 갉아 먹히기 마련이며, 갉아 먹히다 보면 그것이 무시할 수 없는 상처로 곪아 타지는 법이다.”고 말했습니다(행복생각).

 

교환의 불편을 덜기 위해 등장한 돈

 

사실 돈의 시작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물물교환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습니다.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물건을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환의 기회가 점차 빈번해지고 교환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처음에는 별것 아니었던 돈의 교환 기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의 주요한 기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상품 구매뿐 아니라 명예, 지위, 품위, 아름다움, 재미, 예술까지도 구매할 수 있는 교환의 신(神)으로 등극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자동차를 비롯해 모든 물건의 가치가 돈으로 평가도지 않습니까. 얼마짜리냐가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까. 예술이나 문학도 얼마나 많이 팔렸느냐가 중요하고, 사람의 능력이나 가치도 그 사람의 수입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불편을 덜기 위해 발명된 돈이 언제부터인지 사람을 부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굴욕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돈의 환상과 현실

 

돈이 교환의 신으로 등극하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집은 물론이고 아내와 행복도 손에 넣을 수 있고, 사회적인 품위와 명예도 얻을 수 있고, 권력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인 기업이 사람들의 눈과 귀와 뇌를 향해 ‘돈이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구매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광고를 쉼 없이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가치관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생활의 자유를 제공하기도 하고,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행복을 북돋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돈의 유익입니다. 하지만 돈이 삶을 파괴하기도 하고, 형제간에 싸움을 부르기도 하며, 행복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행복한 경우도 많고, 가난할 때는 행복했던 부부가 부자가 되고 나서 오히려 불행해진 사례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당첨된 이후 자살하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이혼했다는 통계도 인간과 돈의 관계, 돈과 행복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마이어스 교수는 1960년대와 1990년대 중반의 미국의 사회변화를 비교 연구했습니다. 30여 년 사이에 1인당 국민소득은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반면에 이혼율이 2배, 10대 자살률이 3배 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폭력 범죄가 4배,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의 수가 5배, 미혼모가 낳은 신생아의 비율이 6배, 동거부부가 7배 늘었습니다. 우울증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무려 10배가 늘었습니다(우리는 행복한가에서 재인용).

 

18년째 행복을 연구하고 있는 긍정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연봉이 3만 달러 미만인 사람은 5만 달러를 벌면 감격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10만 달러 이상을 버는 사람은 25만 달러는 벌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792명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는 50% 이상이 ‘부가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응답했고, 1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 중 3분의 1은 ‘돈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부자들의 실제 생활을 조사한 통계적 진실입니다(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했습니다(눅19:23-24). 여기서 천국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사는 세계, 생명이 꽃피고 삶이 폭발하는 새로운 사회를 의미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삶이 갉아 먹히지 않는 사회, 진리와 행복이 충만한 사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돈이 삶을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소외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찾아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는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것을 보아도 돈이 삶을 길어 올리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사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18:18-23).

 

요즘 행복학이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 연구 논문 목록을 보면 ‘행복’, ‘삶의 만족’, ‘웰빙’에 관한 논문 숫자가 1979년에 150편이었던 것이 1989년에는 780편으로 늘었습니다. 최근에 하버드 대학에서는 ‘행복학’이 학생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강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행복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것일까요? 먹고 살만해지니까 행복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선진국이 되고 지금보다 더 잘 살게 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지수도 높아질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국민 소득이 올라가고 보니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범죄가 많아지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무엇이 문제일까? 돈과 행복의 관계가 어떤 것이기에 소득이 높아졌는데도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을까? 그래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행복학’입니다. 그러고 보면 ‘행복학’ 자체가 행복의 역설,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역설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돈에 붙들려 사는 이유

 

우리는 이미 돈이 행복 증진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분적이나마 경험했습니다. 여러 연구 결과와 현실의 많은 경험들을 통해, 또 성경을 통해 돈이 행복에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객관적으로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돈이 많으면 삶의 질이 더 윤택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들 돈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종교생활을 하든 안 하든, 어떤 종교를 믿든 관계가 없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는 것은 이 시대 최고의 믿음, 최고의 가치, 최고의 슬로건, 최고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67년부터 매년 신입생 조사(American Freshman Survey)를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를 묻는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이 지극히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1967년 조사에서는 “그렇다”고 응답한 학생이 42%이었고, 385개 대학의 263,710명이 응답한 2005년 조사에서는 71%이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의미 있는 인생철학을 정립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거나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응답한 학생은 1967년에 87%, 2005년에 52%가 그렇다고 응답했답니다(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이 통계를 보면 미국 대학생들의 의식이 지나치게 경제 일변도로 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조사를 했는데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여러 연구 결과와 현실의 많은 경험들을 통해 돈이 행복에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돈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일까요? 왜 돈에 울고 돈에 웃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돈의 현실적 가치에 갇혀 있고, 돈의 현실적 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보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이거든요. 돈이 제공하는 혜택이 정말 많거든요. 인생의 문제들을 가장 빨리 해결해주는 것도 돈이거든요. 사실 돈의 힘은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이잖아요. 문화, 예술, 종교, 사상, 아름다움까지도 다 돈 앞에 무릎 꿇었잖아요. 돈이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꿰찰 수 있고 맺힌 것을 풀 수 있잖아요. 이것이 삶의 현실이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돈을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돈벌이에 매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돈이 교환의 신이고 모든 평가의 잣대인데 어찌하겠습니까? 돈의 현실적 가치에 갇혀 있는 한 돈에의 본능적인 집착은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돈에의 본능적인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의 현실적 가치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돈으로 굴러가는 생활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더 큰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커보였던 돈이 작아 보입니다.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돈의 현실적인 교환 능력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돈의 힘에 붙들려 살고 있습니다. 돈이 전부인 삶의 피상성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과거에 비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고, 돈벌이에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생계를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돈벌이에 매달리는 것을 두고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고상한 척 앉아서 그들의 삶을 동물적이라고 힐난해서는 안 됩니다. 돈은 현실적인 생활과 생존의 밑천입니다. 생활과 생존을 위해 돈벌이를 하는 것은 누구나 해야 하는 삶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이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존재를 배반하는 것이고, 생명을 홀대하는 것이며, 삶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살아내는 것은 진실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숭고한 생명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생존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생존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성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돈을 바라보는 두 극단

 

주변을 둘러보면 돈과 삶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극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돈의 현실적인 힘에 일찍 눈뜬 자들의 극단입니다. 이들은 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고상한 척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우습게 생각합니다.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이상주의쯤으로 폄하합니다. 이들은 일찍이 돈이 최고라는 걸 간파한 자들입니다. 돈이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걸 삶으로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돈의 권력에 눈뜬 것은 책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온 몸으로 현실을 뒹굴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돈의 힘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이 최고라는 이들의 확신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소유의 넉넉함이 존재의 풍성함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돈벌이에 온 삶을 투신하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아예 내놓고 돈을 추구합니다. 돈벌이에 전념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돈만이 현실입니다. 돈보다 더 앞선 가치, 돈보다 더 현실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돈의 종속변수일 뿐입니다.

 

둘째, 돈을 더러운 것으로 죄악시하는 자들의 극단입니다. 이들은 돈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사람과 삶을 타락시키는 유혹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의 많음은 존재를 파괴할 뿐이지 존재의 풍성함에 기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부자들을 정죄하고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극단은 언제나 그렇듯이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생각은 돈과 삶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소외시킬 뿐 화해시키지 못합니다. 사실 돈 문제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돈을 섬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돈이 적은 가난도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단지 불편의 문제쯤으로 이야기합니다만, 가난은 결코 불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가난은 어쩔 수 없이 존재를 어지럽히고 삶을 위축시킵니다. 위대한 자유를 갉아먹고, 소중한 관계를 파괴합니다. 실로 가난은 삶의 모든 축복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입니다. 때문에 양극단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극단이 아닌 제삼의 길, 즉 돈과 삶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돈이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 길, 돈이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돈이 행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

 

그 길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돈이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돈을 돈 이상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됩니다. 돈의 현실적인 구매능력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경계하고 돈을 돈의 위치에 앉혀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돈은 삶을 나르는 통로가 될 수 있고, 삶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제 위치에 앉혀놓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돈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돈 앞에 무릎 꿇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돈은 이미 지상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는 돈이 왕 노릇하는 이 시대를 향해 묻습니다. “한 가지 남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는가? 돈이 그 앞에 사람들을 죄다 무릎 꿇리는 진정한 신이어야 할 까닭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행복생각). 그렇습니다. 문제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숭배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고, 돈이 삶과 통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람들이 광고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텔레비전이나 각종 미디어를 통해 쉬임 없이 속삭입니다. 길거리든 건물 옥상이든 지하철이든 극장이든 담벼락이든 안방이든 하늘이든 바다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유혹합니다. 멋진 상품을 사라고, 특별한 상품을 사면 당신의 삶이 특별해 지고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추기고,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모방심리와 질투심을 자극합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광고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꾸며낸 교묘한 전략이고,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한 심리 조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런 광고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적인 사기놀음에 놀아나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호주머니를 털리고 있습니다. 헛된 자존심과 부풀려진 허영심을 소비와 소유를 통해 채우고 있습니다. 쇼핑하는 즐거움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돈이 삶과 행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사람을 다스리는 굴욕의 시대를 끝장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과 삶이 화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돈을 돈 이상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자본가들의 광고에 길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삶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거듭 생각하며 산다면, 돈을 숭배하지 않고 부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면, 돈의 한계를 알고 삶을 위한 도구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광고에 속지 않을 분별력이 있다면, 소유가 존재를 풍성케 해주지 못한다는 진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돈과 삶은 얼마든지 화해할 수 있습니다. 돈이 삶을 일구어내고 자유를 확장시키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돈 버는 일에 투신해도 삶이 황폐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돈에 굴욕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기에 앞서 돈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 뭔지,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한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벌기에 앞서 돈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과 삶을 화해시킬 수 있는 인격의 힘,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합니다. 소유보다 삶이 더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돈이 삶을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돈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돈이 인생의 골치 덩어리가 된 것은 돈을 다루는 사람이 골치 덩어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인은 지식은 밝은데 지혜는 어둡습니다. 생활에는 열심인데 삶에는 게으릅니다. 과학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삶의 기술과 사랑의 기술은 퇴보했습니다. 정보와 만남의 영역은 무한정 넓어졌지만 사고의 깊이와 만남의 깊이는 잃어버렸습니다. 각종 문화 활동은 활발해지고 다양해졌지만 생활 속의 멋은 시들해졌고 문화적 이해력은 천박해졌습니다. 소유에의 욕망이 존재에의 욕망을 죽인지 오래되었습니다. 눈앞의 경쟁을 좇아가느라 생활에 바쁠 뿐 생활보다 소중한 삶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행복을 위해 돈을 벌고 있지만 실제로는 돈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는 슬픈 바보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돈 자체는 결코 삶을 보장해주거나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을 삶이 되도록 보듬어주고, 행복의 씨앗이 자라도록 북돋아주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삶을 풍성케 해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입니다. 돈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돈이 삶을 창출하기도 하고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존재를 풍성케 하기도 하고 존재를 흔들기도 합니다. 행복을 북돋아주기도 하고 행복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베르트랑 베르줄리는 “돈이란 자신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자들을 제멋대로 농락하는 잔혹한 신이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돈이 삶을 풍성케 하고 행복을 담보해준다고 믿는다면 돈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옥죄고 짓밟을 것입니다. 통째로 하나인 우리의 삶을 수많은 파편으로 산산조각 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돈의 잔혹한 진실이고 돈의 이중성입니다. 돈에게 농락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