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빚진 자의 너스레

새벽지기1 2023. 9. 16. 07:01

나는 빚진 자다. 사위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지피기 위해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다. 병상에서 부른 생명의 노래와 사랑의 찬가는 온전히 사랑의 빚을 진 결과였다. 크고 작은 사랑이 나로 하여금 생명의 노래와 사랑의 찬가를 부르게 했고, 나는 빚진 자라는 ‘빚진 자 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사실 나는 수술 이전부터 빚진 자였다. 수술을 하기 1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세 식구가 한가하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들 녀석이 뜬금없이 말했다. 아빠는 엄마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라고. 맞다. 아들놈이 정확하게 말했다. 아내의 헌신적인 돌봄과 사랑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또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식도 정맥류 출혈로 이미 오래 전에 나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을 회복해가며 활력을 되찾아가는 건 전적으로 아내와 아들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이다. 아니다. 아내와 아들뿐 아니라 의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이들, 지난한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중보와 사랑 덕분이다. 그렇다. 이미 죽었을 수도 있는 생명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보다 더 크게 기뻐하고 감격하면서 생명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끈들이 작용한 덕분이다.

 

수술을 마치고 감당키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아들이 고통이 잦아들 즈음 내 병실을 찾아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생체 이식은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아. 가족이 아니면 할 수도 없겠지만, 만일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간을 기증받으면 받은 사람이 일평생 그 부담을 안고 어떻게 살 수 있겠어?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생체 간을 기증받는다는 건 정말 생각할 수 없는 일 같아.” 맞다. 내가 만일 아들에게 간을 빌리지 않았다면 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가족이라도 조카나 형제들에게 받았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형제나 조카에게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선뜻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들에게 받는 것만큼 흔쾌하거나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식이라고 해서 왜 미안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이야 형언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 정녕 그랬다. ‘이건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뻔뻔함에서 오는 뻔질 이의 편안함과는 달랐다. 한없이 행복하고 뿌듯하고 푸근한 편안함이었다.

 

세상에는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값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있는 간의 절반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와 자식밖에 없었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내미는 손을 편안하고 행복하고 뿌듯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와 자식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가족이 무엇인지가 보였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주는 관계,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생명을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 다 주어도 아깝지 않고 다 받아도 부담 없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라는 놀라운 진실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부부는 함께 생명을 낳은 특별한 관계이고, 부모와 자식은 직접적으로 생명을 주고받은 관계였다. 생명을 함께 공유한 생명적 관계가 바로 가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아들 놈 행적이 생각난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좀 다르지만 예전에는 아들 녀석이 돈을 달라 할 때, 한 번도 미안해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나 “엄마 만 원”, “아빠 이만 원”하면서 손을 내밀면 끝이었다. 마치 맡겨 놓은 돈을 달라는 투였다. 그런데 참 묘한 건, 그런 아들의 행동이 오히려 사랑스럽고 좋았다는 사실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아들의 행동이 맘에 들었다. 돈을 주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만일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더라면 굉장히 기분 상했을 것이다. 그렇다. 가족이란 참 묘하다.

 

기왕 빚쟁이임을 밝혔으니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나는 6년째 백수로 살고 있다. 돈을 벌지 못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일 년에 약값과 병원비로 적지 않은 돈을 축내면서 살았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라 벌써 6년째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 하나도 무공해 유기농으로 골라 먹여야 하고, 좋다고 하는 곳은 전국 어디나 찾아다녀야 하는 골치 덩어리였다. 내 존재의 형편이 그러했다. 그런데도 그런 나를 아내는 한 번도 내치지 않았다.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돈 벌지 못한다고, 힘들게 고생만 시킨다고 푸념하지 않았다. 항상 극진하게 돌보며 사랑으로 대접해주었다. 학교에 출근할 때마다 오늘도 마음 편하게 잘 놀라고 웃으며 격려해주었다. 나는 과분하게도 왕처럼 특별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랬다. 그 사람이 가족이었기 때문에, 아내였기 때문에 나는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며 살 수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이 아내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게 백수로 살 수 있었겠는가? 아내가 주는 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밥값도 못하면서 눈칫밥을 먹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가족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고, 편안하게 간을 빌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한없이 받아도 뻔뻔할 수 있는 것이 가족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나도 역시 빚진 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존심만은 지키며 살고 싶었다. 내 책임은 내가 지며 살고 싶었다. 나와 아내 모두 빚지고는 살지 못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빚지는 것은 무엇이 됐든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나름 최선을 다했다. 개인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할 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 몸이 무너져 교회에 짐이 된다고 생각되는 순간 주저함 없이 사임한 것도 그래서였다. 정직히 말하건대 진실로 그랬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과 모든 자연에게 빚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사람에게 빚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나이 오십을 넘어 인생의 원숙기에 들어서야 할 때, 베풀어야 할 때 오히려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고, 육친과 신앙의 지인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수술을 집도해 꺼져가는 생명을 살린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진정어린 수고에 빚을 졌다.

 

이처럼 원치 않는, 정말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빚짐 의식을 획인하면서 나는 빚짐을 곱씹어보았다. 찬찬히 인생을 돌아보며 곱씹어보니 나만 빚지고 사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빚지며 살고 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모든 생명이 모든 생명에게 빚지며 살고 있었다. 산다는 건 빚짐이었다. 빚지며 사는 것이 인생이었다.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음으로 목청껏 외쳤다. “그래! 나만 빚진 건 아니야? 세상에 어떤 놈이든 빚지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비록 마음으로 외쳤지만 맘껏 소리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유쾌 ․ 통쾌 ․ 상쾌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유쾌 ․ 통쾌 ․ 상쾌했는지. 정말 찬바람에 샤워를 한 듯 마음이 후련했다.

 

그렇다. 세상에 빚지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 물과 공기에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땅과 땅을 일구는 농부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하늘과 바다와 산과 들에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집과 옷을 만드는 자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새와 벌과 나비에게 빚지 않은 인생이 없고, 고래와 소와 나귀에게 빚지 않은 인생이 없고,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바흐와 고흐와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부모와 스승과 친구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태양과 별님과 달님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고, 모든 생명에게 빚지지 않은 인생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게 빚졌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나 혼자만 채무 인생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생은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와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에게 빚진 채무 인생이다. 인생은 어찌할 수가 없다.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길이 남을 성취를 했다 할지라도 인생은 결코 채무를 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난 특별한 빚쟁이임이 분명하다. 세상 누구보다 많은 빚을 진 것이 사실이다. 지금 내 영혼은 ‘빚진 자 의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 ‘빚진 자 의식’으로 인해 마음이 무겁거나 힘들지가 않으니 말이다. 빚을 갚아야겠다며 의지를 다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마음이 무겁기는커녕 빚짐 의식을 일깨우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하니 말이다.

 

살면서 발견하는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는 이것이다. 삶은 역설로 가득하다는 것.

죽음의 어둠이 생명의 찬란한 빛을 보게 하는 창이 되고, ‘빚진 자 의식’이 감사와 겸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역설,

바로 이런 역설로 가득한 것이 삶이라는 것.

그렇다. 삶은 역설이요, 산다는 건 빚지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채무 인생이다.

하여, 감히 말한다. 빚으로 가득한 부끄러운 인생이 감히 머리를 치켜들고 말한다.

인생이여! 고개를 숙이라! 치켜 든 머리를 낮추라!

하나님과 만물 앞에 엎드리라! 다시 말하노니 엎드리라!

그 엎드림이 바로 예배이니 돌멩이와 풀잎에게 입 맞추라!

엎드림이야말로 진정한 찬양이요 예배이니 엎드리고 또 엎드리라!

빚진 자여!

빚진 자여!

엎드리라!

예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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