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죽음과 삶 / 정병선목사

새벽지기1 2023. 9. 5. 07:03

죽음, 그것은 나에게 그리 낮선 세계가 아니었다. 간경화가 악화되는 걸 몸으로 느끼고,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을 드나들면서 나는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5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드나들 때였는데, 갑자기 현재의 간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 것보다는, 남은 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준비하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에 의사 선생님께 가볍게 물었다. 지금 이 몸으로 얼마나 살 수 있겠느냐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가볍게 대답했다. 5년은 살겠다고. 정말 가볍게 묻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기분이 묘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고,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5년,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라는 생각과 적어도 5년은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말에 그다지 괘념하지도 않았고, 마음이 약해지지도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못 쓰는 글을 쓰느라 낑낑대면서 즐겁게 살았다. 하지만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진 않았다. 넌지시 죽음을 응시하며 바라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죽음 바로 옆에 서는 것은 또 달랐다. 죽음을 멀리서 바라볼 때는 찬찬히 죽음을 응시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죽음이 바로 옆에 다가오자 죽음은 잊히고 생명이 웅성거리는 거였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분명히 죽음을 생각했었는데, 생명 현상의 경계선에 서자 죽음은 뇌리에서 사라지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거였다. 보이는 건 오직 생명뿐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죽음 가까이에 갈수록 생명이 또렷하게 의식되었다. 그리고 생명과 삶이 그처럼 아름답고 찬란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절실하고 소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생명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모든 생명이 경이롭고 탐스러웠다. 죽음의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바라본 생명의 세계는 정말 눈부셨다. 진실로 모든 생명은 예술이었다. 한없이 위대하고, 한없이 완전하며, 한없이 아름다웠다. 세상의 어떤 예술 작품보다도 더 예술적이고, 세상의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구조적인 것이 생명이었다. 물론 생명처럼 연약하고 허망한 것도 없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 생명이다. 하지만 생명처럼 역동적이며 강인한 것 또한 없었다. 생명처럼 우아하고 빛나는 것 또한 없었다. 진실로 그랬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바라 본 생명의 세계는 숭고할 만큼 아름답고 위대했다. 물론 피조물 주제에 생명의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생명의 비밀은 전적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신비와 그 비밀을 알뿐 사람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가까이에서 바라본 생명의 세계는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위대했다. 별이 어둠 속에서 빛나듯 생명은 죽음 앞에서 찬란히 빛났다.

 

물론 그동안에도 찬란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할 때면 병원 밖의 세상이 그렇게 찬란할 수가 없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푸른 하늘과 크고 작은 나무들, 또 길을 걷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매연을 뿜어내며 달리는 차들의 행렬까지도 생명이 고동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평상시에는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짐짝처럼 보이고, 차들이 괴물처럼 보였었는데 말이다. 정말 사람의 시선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 불평하던 것이 순간에 감사로 바뀌기도 하고, 감사하던 것이 순간에 불평으로 바뀌기도 하며, 흉측하던 것이 아름답게 탈바꿈하기도 한다. 현상은 똑같은데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이번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도 그랬다. 똑같은 생명이 죽음 앞에선 더욱 빛났다. 죽음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생명의 빛은 찬란했다.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하나의 생각, 매우 낯선 생각이 떠올랐다. ‘삶,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죽음, 그리고 삶’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지금까지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만을 당연하게 생각했었으니까. 삶이 죽음으로 달려간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었으니까. 그런데 정 반대의 생각 - ‘삶에서 죽음으로’보다는 ‘죽음에서 삶으로’가 더 큰 진실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내 안에 들어왔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 든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죽음의 커튼이 내려오는 걸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젊은 시절, 러시아 제정(帝政) 말기 사회주의 혁명이 태동하던 때에 급진적인 정치 조직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사전 통고도 없이 사형장으로 끌려가 총살형을 선고받고는, 얼굴을 가린 채 병사들이 겨누는 총부리 앞에 섰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하나는 ‘이토록 빨리, 또한 영원히 어둠 속으로 들어서야 할 찰나로구나.’라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만약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갑작스럽게 무한하고 완전한 영원으로서 매 초가 한 세기를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스쳐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리라. 인생의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단다. 아! 죽음의 사자가 턱밑까지 달려와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순간 에 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음속에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는 게 참 놀랍다. 정녕 그랬을 것이다. 어찌 아니 그랬겠는가. 1초가 영원 같이 소중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을 막 넘으려는 순간 한 병사가 감형이라는 황제의 전갈을 전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극적으로 죽음에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면한 그날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 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정녕 그랬을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까지 왔었는데, 생명이 마지막 골목으로까지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왔는데 어찌 아니 그랬겠는가. 어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어떤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허물과 악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삶 또한 죄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로 그의 삶의 지평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전에 비해 삶이 풍성하게 살아났을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무릇 생명의 세계란 죽음을 통해서 보아야만 제대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생명과 삶의 세계는 일차적 생명-물리적 생명을 통해서는 발견하기 어렵고, 일차적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보아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이 생명을 생명과 삶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이 생명을 생명과 삶으로 인도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든다. 죽음도 은총일 수 있다는.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보는 창이라는. 비록 죽음이 죄악의 열매요 생명의 원수이며 하나님의 저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열매요 생명의 원수인 죽음까지도 생명과 삶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사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은 너무도 다른 두 세계였다. 너무도 먼 두 세계였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죽음은 삶의 다른 얼굴로. 삶은 죽음의 다른 얼굴로. 물론 나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의 생명과 현대 의학에 기대어 죽음을 미루었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을 알지 못한다. 생명의 비밀 또한 알지 못한다. 나뿐 아니라 모든 생명과 삶이 죽음을 아는 것 같지 않다. 동양의 현자인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을 만큼 도(道-진리)를 추구한 사람인데, 그런 공자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신앙의 사람 파스칼은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길 없는 죽음 그 자체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삶이 죽음을 모른다는 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죽음은 분명 인생 최고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성의 레이더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요, 삶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경험 너머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 가까이에 가본 자들은 많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본 자들은 많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죽음 가까이에서 생명을 보고 삶을 보았다고. 교통사고로 죽음 가까이에 갔었던 헨리 나웬 신부도 말했다. 죽음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언젠가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모든 생명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삶의 비극적 현실을 돌아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삶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유혹인 듯하고, 죽음은 소진한 삶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품 같다.”

과연 그럴까? 죽음이 정말 소진한 삶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품 같을까? 물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죽음이 생명의 세계를 보게 하는 참된 창이라는 것, 생명의 세계만으로는 생명을 보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낮에는 별을 볼 수 없고 어둠이 내려야 볼 수 있듯, 생명만으로는 생명을 볼 수 없고 오직 죽음의 창을 통해야만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긴 하나 진실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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