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국교회부흥

일부 교회의 무속화 현상 1

새벽지기1 2021. 12. 23. 06:44

일부 교회의 무속화 현상 1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 이후 토착화 과정에서 무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교 초기 한국의 무속이 기독교 전래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무속화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기독교 본질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Ⅰ. 무속화 위험수위 넘어


기독교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지적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교회들이 무속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지적은 물론 한국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말씀을 배우고 전하며, 주안에서 지체된 성도들 간에 교제를 나누며, 주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일부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정통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오늘날 일부 무속화된 교회의 교인들은 목사가 마치 무당인양 생각하고 목회자가 재난을 추방하고 복을 빌어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김창주 목사는 “(무속화된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은 일정한 자기 관할권이 있는 지역의 전속 무당인 단골무당이 한달에 몇 차례씩 자기 단골 가정을 방문하는 것과 같이 교역자의 심방을 고대한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는 것을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굿’에 참여한 구경꾼 같은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인 신앙이 급기야는 교회분열의 원인이 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샤머니즘을 연구한 학자들은 또 무속이 교회에 끼치는 영향으로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를 곧잘 예를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당은 종교적 신비체험을 가진 자로서 일단 강신무로 인정되면 그 권위는 신만큼이나 절대적이어서 모든 일이나 마을 행사 등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고대의 제정일치 시대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는데 한국교회에서도 일부 목회자들이 카리스마적이요, 다혈적인 모습과 권위를 가지고 교회의 모든 일을 독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군림하고 다스리는 독선의 신적 권위자로 자처하는 모습은 민속신앙의 영향이라는 주장이다.


이들 학자뿐만 아니라 뜻 있는 목회자들은 한국교회가 무속화되어 가는 것에 크게 염려하고 있다. 이들이 염려하는 것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와 부흥회이다.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와 부흥회는 민속신앙의 ‘부락제’ 내지는 무당의 ‘단골판’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무당이 굿하듯이 부흥사를 불러다가 광신적인 집회를 여는 것은 ‘기독교 푸닥거리’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불의 사자’, ‘은사의 종’, ‘신유의 종’으로 불리우며 그 부흥회의 메시지가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축복에 있으며, 부흥회의 목적이 회개운동이 아니라 교회건축 등 타목적에 이용됨은 민속신앙의 심성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Ⅱ. 일부 교회들의 기복신앙


한국 전통 신앙 가운데 특히 무속이 기독교에 끼친 악영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복사상을 꼽는다. 기복신앙을 문제삼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무속의 기복사상이 종교를 주술적으로 변질시켜 많은 폐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 교회가 기복사상의 늪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복을 바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서 기복신앙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바칠 헌금을 복받기 위해 바치는 제물처럼 생각해서 많이 받치면 그만큼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교회출석이나 교역자 대접,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가 다 하나님께 받은 바 은혜의 감사, 감격의 표시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얻기 위한 보상의 수단으로 드리게 하고 있다.”(이장식. '한국교회 어제와 오늘’)


특히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내’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마다 입시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심지어 ‘100일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바로 입시철인 11월이다. 신도들은 오직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매달리는 것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헌금 부분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신광철. '기복주의’)

한국교회가 기복주의에 빠지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은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무속신앙의 기복사상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특징이다. 무속신앙에는 정신적인 복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후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무속의 기복사상이 그대로 기독교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복을 위해서 신을 믿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적인 응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 등이 바로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속의 기복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이 복을 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복 빌기가 자기 자신에 치중해 있다는데 있다.

Ⅲ. 개인 영혼구원에 집착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개인화 되는 경향이 짙어만 가고 있다. 도무지 다른 사람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 자신, 내 가족, 내 교회만 잘되고 복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관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무속에서 신은 도무지 타인과 함께 하는 신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도 철저하게 개인과 함께 하는 신이 되어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아닌 나와의 수직적이고 종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개인 영혼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설명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고 배타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Ⅳ. 신비체험 지나치게 강조


무속이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교회 교인들 신앙양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속적인 경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하나가 바로 신비체험이다. 일반적으로 무속신앙은 강신체험과 엑시타시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양태에는 이와 같은 무속적인 요소가 짙게 배여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신비체험과 에시타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성령의 사역과 은사가 크게 변질되었으며, 마치 무당의 강신체험이나 신비체험 같은 간증이 교회에서 환영받게 되는 이상풍조가 생겨나게 됐다는 지적이다.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서 성령체험을 했다고 하는 교인들의 대부분이 성령체험의 증거로 손끝이 떨리고, 진동이 오고, 몸이 화끈거리며, 불을 느끼고, 방언을 말하며, 환상과 환청을 그 예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무당의 강신체험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교회에서는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은혜를 받은 것이며, 감각적인 느낌을 가져야 성령을 체험한 것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무속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가운데 또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비윤리성(非倫理性)이다. 무속에는 한 마디로 말해 가치나 윤리성이 없다. 한 가지 가치의 기준이 있다면 다다익선뿐이라는 것이 무속을 연구한 학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무속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하는데 선신(善神)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신(惡神)은 재앙을 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선신이라도 대접을 잘하지 않으면 재앙을 줄 수도 있고, 악신이라도 잘만 대접하면 복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무속에서 선악 악은 윤리적인 규범이 되지 못하고 다만 물질적인 축복이 선과 악을 구분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선신과 악신의 구별이 모호하다. 따라서 선과 악은 윤리적 규범이 못되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선교 초기 한국의 전통신앙인 무속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어느 사이 이 땅의 복음이 뿌려진 옥토에는 하나 둘씩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예배시간에는 열광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자신의 잘못을 잘도 회개하지만 예배 후,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한국교회 일부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옥황상제나 염라대왕같이 천상이나 혹은 사후에 가는 어떤 곳에 있는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기도나 찬송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무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이 믿는 신은 기독교 본래의 성서적인 삼위일체 신관에서 많이 이탈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속에 깊이 빠진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의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성서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각각 따로 생각하여 성부는 한국의 민족의식 속에 계속 전해져 내려 온 최고 신 개념인 하느님으로 보고, 성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해 주는 무당적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성령은 이신하여 엑시타시를 경험하게 하는 샤머니즘적 신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이 땅에서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루빨리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속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양적인 성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제는 질적인 성장을 위해 고민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신문)